시 ‘아아 광주여!…’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그리고 대중가요 ‘바위섬’
1980년 5월에 나는 대학에 복학하여 1학년이었다.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더니 바로 소집 영장(입영통지서)이 나와 입대해 33개월간 복무한 나는 1980년 2월에 만기 전역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당시 집에서 받던 <조선일보>를 읽으면서 복학생들과 함께 정국을 멀찌감치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겪은 1980년 5월
20대 초반을 군대에서 짬밥을 먹다가 돌아와 다섯 살 아래의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된 나는 무엇인가 위태위태한 일촉즉발의 위기가 내연하고 있는 듯한 학교 분위기가 마뜩잖았다. 단과대학 게시판에 날마다 울긋불긋하게 매직으로 갈겨쓴 대자보가 전해주는 낯선 소식들과 노천극장에서 시작된 집회의 함성 앞에 얼마간 주눅이 들기도 했다.
대학 운동권은 이미 지난해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듯했다. 정작 제대 말년에 나는 10·26을 겪었고, 폭동진압 훈련에 동원되었으며, 마지막 휴가 중이던 12·12 당시에 우리 부대가 진압군으로 출동했다가 회군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보로 정국을 살펴볼 만한 안목을 갖추지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지도 못한 맹탕 어리보기에 불과했다.[관련 글 :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 전두환의 신군부,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다]
대학에 돌아온 두 달 후에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5월에 비상계엄이 시행되면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한 해병대 병력이 학교를 닫아 버렸다. 시골에서 서둘러 달려온 학교, 해병대 병사들이 막고 있는 교문 앞에서 황당하게 발길을 돌리던 그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1학기를 집에서 보낸 학생들은 9월이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학교에는 사복 경찰이 잠행 중이었고, 학생들은 모여서 낮은 목소리로 은밀한 정보를 주고받곤 했다. 신군부의 공포정치가 이어지면서 더는 학교에 대자보도, 집회·시위도 없는 ‘태평세월’이 수년간 계속되었고, 나는 1984년 2월에 졸업하고 3월에 경주지방의 한 여학교에서 초임 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의 오월은 분명히 그 안에 엄청난 진실이 폭약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 정작 그 내용에는 어떤 접근도 할 수 없는 비밀의 문 저편에 굳게 닫혀 있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에 수없이 복사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해득이 불가능한 비디오 영상을 보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진실을 더 꼭꼭 숨기는 것과도 같았다.
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도서출판풀빛’에서 황석영(실제 저자는 이재의·전용호, 황석영은 이름만 빌려주었다)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펴낸 것은 1985년 5월이었다. 인쇄 도중 1만 권을 통째로 압수했지만, 나병식 대표가 미리 인쇄소를 한 군데 더 구해놓은 덕분에 거기서 급하게 찍은 1만 권이 시중에 깔렸다. 군부 정권은 그것마저 수거하려 애썼지만, 광주의 진실은 복사본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세상에 퍼져나갔다.
책을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정권의 압수 전에 내가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구속을 각오하고 책을 썼던 저자들과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면서, 자신이 원저자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원고를 한장 한장 필사한 황석영 작가가 없었다면 광주의 진실이 드러나는 건 훨씬 더디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고 황석영 작가가 사실상 국외로 추방되는 비용을 치르면서 확보한 진실이었다.
우리가 풍문처럼 들었던 5·18 이야기들은 뒷날 모두 진실로 밝혀졌지만, 진실을 직면하면서 인지 부조화를 겪은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모호한 언술로 그 진실을 은근히 암시하곤 했는데, 아이들은 잔뜩 긴장하면서도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5공 청문회 등을 통하여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졌다. 역사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농단 되고 비화의 형식으로 후대에 공개되는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1980년 전후사에서 국민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그런 비사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이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의 전신)에 발표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광주항쟁을 다룬 첫 번째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뒷날의 일이다. 이 109행에 이르는 장시는 군부의 검열로 고작 1/4 남짓인 33행만이 실렸다. 그러나 시인은 보안대를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근무하던 학교에서 해직되었다.
김원중의 대중가요 ‘바위섬’
1985년, 교직 2년 차에 나는 가르치던 아이들과 함께 진급하여 2학년 담임을 맡았고 아이들과 설악산 수학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은 3박 4일 동안 이동할 때마다 대중가요를 합창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가 김원중이 부른 ‘바위섬’이었다.
아이들이 그 노래를 얼마나 불러댔는지 이내 내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나는 무심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말았지만, 그 노래가 항쟁 때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댄 노래였다는 사실은 훨씬 뒷날에야 알게 되었다.
김원중은 1984년 광주지역 가수들이 지역에서 낸 옴니버스 음반 ‘예향의 젊은 선율’에 이 곡으로 참여했다.‘바위섬’을 만든 배창희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 같다고 느꼈고, 이에 영감을 얻어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것이었다. 음반은 운 좋게도 지역의 라디오 전파를 탔고, 특히 ‘바위섬’은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까지 퍼지면서 김원중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5년 1월, 김원중은 서울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면서 공식적인 가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슬 푸른 전두환 정권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어여서 그는 방송에서 ‘바위섬’의 의미를 말할 수 없었다. 뒷날 방송에서 그 뜻을 조심스럽게 밝혔지만, 다행히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뒤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 라디오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며, 1985년 KBS의 ‘좋은 가사’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광주의 아픔을 담은 지역 대표곡 ‘바위섬’은 대중가요로 거의 국민가요 수준의 히트곡이 된 것이다. [이상 관련 기사 “고립된 5·18 광주를 노래 바위섬” 참조]
김원중은 1987년 ‘견우와 직녀’ 설화를 빌려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문병란(1935~2015)의 시에 박문옥이 곡을 붙여 만든 ‘직녀에게’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방송금지처분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떠났던 김원중은 198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길거리 공연을 시작한 이후 민중가수로 지금껏 치열하게 살고 있다. [관련 글 : ‘직녀에게’의 시인, 문병란 떠나다]
항쟁 43년을 지나면서 광주항쟁은 보편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인식되면서, 광주는 지역성에 갇히지 않고 전국적 보편성을 얻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의 인권 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서 광주항쟁은 자랑스럽고 숭고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유산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유산, 그러나 넘어야 할 문제들
그러나 아직도 온존한 영남인들의 ‘반호남 지역감정’은 상식과 논리로 설명하기 힘들다. 물론 일부 세대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광주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는데도 영남인들의 호남인 기피와 혐오는 가시지 않는다. ‘가해’와 ‘피해’의 도착된 기억들 위에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의 논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련 글 : 그 ‘맥주공장’은 광주로 가지 않았다]
일부 극우 인사들의 광주항쟁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정서에 숨을 수 있어서다. 망국적 지역감정은 통합의 정치를 통해 해소 극복되어야 하지만, 현 정부의 지역 편향은 퇴행적이고, 최근 집권당 최고위원의 망언은 그런 상황을 웅변하고 있다.
주변엔 아직도 광주항쟁을 ‘광주 사태’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말버릇이 아니라, 그건 인식과 관점의 문제다. 언제쯤 영남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지역감정이나 기피와 혐오의 정서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바라보게 될 수 있을까.
2023. 5. 16. 낮달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알린 5·18의 기록자들
그간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 서,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알린 외국인 5·18의 기록자들도 세상을 떠났다.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와 미국 AP통신의 테리 앤드슨(1947~2024) 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독일 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 힌츠페터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다. 그는 취재 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인 전용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정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 이 상황은 영화 <택시 운전사>(2017)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일반에 개봉되었다.)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한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어 청년들의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가 목격하고 기록한 광주의 참상은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그의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과 함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관련 자료 : 5.18의 기록자 위르겐 힌츠페터]
테리 앤더슨
AP통신 특파원 테리 앤더슨은 1980년 5월 22~27일 광주에서 현장 취재로 신군부의 발표와는 다른 항쟁의 실상을 세계에 알렸다. 광주에 도착한 그는 사망자가 몇 명에 불과하다는 계엄군의 주장을 외신 특파원들과 함께 직접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망자 숫자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검증했다.
그는 AP통신 도쿄지국을 통해 타전한 기사를 통해 계엄군은 사망자가 셋뿐이라지만 시민군 쪽은 261명이 숨졌다고 했다며, 이렇게 많은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1996년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앤더슨은 자신이 확인한 항쟁의 진실을 증언했다.
“당시 나의 주된 업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 종일 광주를 돌아다니며 주검 숫자를 셌다. 고등학교들, 체육관들, 교회들에서 하루에 179구의 주검을 확인하기도 했다.”
2020년 앤더슨은 광주항쟁 당시 미국으로 보낸 원본 기사, AP 도쿄지국에서 보낸 원고로 추정되는 기사 등을 광주광역시에 기증했다. 기사에서 그는 “광주시민들은 기자들과 담화에서 시위는 처음에 평화롭게 시작됐지만, 공수부대들이 18~19일 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소총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격렬한 저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썼다.
또 그는 신군부의 왜곡된 발표만을 전달하는 국내 언론과 달리 광주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관계자들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말인 불순분자들이 시위를 부추겼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순분자가 개입된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앤더슨은 광주 상황을 기록한 자신의 원고 등을 국내 언론 관계자를 통해 광주시 쪽에 기증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 5·18 광주 현장서 참상 세계에 전한 전 AP 기자 별세]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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