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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노동 2제(題) - 불온한 시대, 불온한 언어

by 낮달2018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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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 ‘노동(勞動)’과 ‘근로(勤勞)’ 사이

 
언어는 기본적으로 시대나 사회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당대의 세계 파악 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땅 곳곳에 팬 역사와 슬픔의 생채기만큼이나 우리 시대의 말은 숱한 앙금과 그늘로 얼룩져 있는 듯하다. 그 가장 오래되고 시방도 계속되는 원인은 이 땅을 동강 낸 이데올로기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공산주의, 이른바 빨갱이 앞에 중무장한 ‘맹목의 반공주의’다.

▲ 판화 '모루', 〈희망은 길이다〉 중에서 ⓒ 이철수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오랜 독재 정권을 끝내고 세 번째 민간 정부를 맞았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반공주의’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로 유명한 ‘government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의 ‘people’을 ‘인민’이 아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재된 ‘국민’으로 번역된다.
 
제헌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가 ‘인민’을 포기하고 ‘국민’을 사용한 것은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술회했다는 일화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비무장지대 저편에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인민공화국’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인민’이 설 자리는 애당초 없는 것이다.
 

‘동무’는 내 유년 시절만 해도 ‘어깨동무 새 동무, 보리 동무 씨동무’라는 노래와 함께 벗들을 정겹게 이르는 우리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친구(親舊)’라는 한자어가 그것을 대신해 쓰이기 시작하면서, 요즘은 갓 걸음마를 떼는 어린애조차 ‘친구’를 입에 올릴 정도가 되었다. ‘괴수’ 김일성이나 김정일 동무가 있는 이상, 이미 그것도 반공 이데올로기에 가위눌린 백성들의 무의식 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금기어가 된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가위눌린 어휘 ‘노동’


통일부 장관을 지낸 학자가 ‘창발(創發: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아니한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는 일)’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보수 진영으로부터 그게 북에서 쓰는 단어라 하여 매도당했던 일은 이 슬픈 시대의 만화다. (방금 나는 아래아 한글의 국어사전에서 위 ‘창발’의 뜻을 복사해 붙였다. 우리 국어사전에 살아 있는 말로 쓰이는 단어도 다소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좌파의 언어’로 탈바꿈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분단의 질곡은 마침내 자유로운 사유를 검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언어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특집 기사의 첫 부분은 한 사회의 왜곡된 기제에 의해 불온시 되는 어휘가 어떤 형식으로 바뀌고 있는가를 웅변으로 증명해 준다.
 
일하다가 발생한, 또는 일과 관련된 사고의 정확한 표현은 ‘노동재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재해’로 불린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재해라는 식으로 본질을 흐리는 용어다. 이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부르는 것과 같은 차원이다.


이 땅에서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고용과 피고용의 실질적 내용을 이르는 말은 이중적이다. “힘써 부지런히 일하다”는 의미의 ‘근로’와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체력이나 정신을 씀, 또는 그런 행위”를 뜻하는 ‘노동’이 그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정부와 자본에 의해 선택되고 순화(?)된 어휘는 물론 ‘근로’이다. 근로는 그 안에 이미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객관적 의미로서의 ‘일함’이 아닌, ‘힘써 부지런히 일함’은 가장 완전한 형태의 노동이고 그러한 노동력을 원하는 자본의 요구가 충실히 반영된 의미인 것이다.
 
그 결과 이 땅에는 법률적으로도 두 개념이 혼용된다. 근로기준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노동관계법이 존재한다. 노동조합법이나 노동쟁의조정법 따위를 근로조합이나, 근로 쟁의로 쓸 수 없는 까닭이다.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뜻을 지닌 ‘노동자’ 대신 ‘근로자’나 ‘산업 일꾼’이 선택되어 쓰이다 보니, 만국 공통의 노동절(메이데이)도 이 땅에서는 ‘근로자의 날’이 되는 것이다.

▲ 오스트리아 국제 노동자의 날 시위에 나선 노동자들

노동과 노동자라는 말은 불온(不穩)하다. 이 나라는 미국을 교과서로 가장 충실히 자본주의의 교의를 따르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보장하는 노동삼권의 행사를 사회적 일탈을 넘어 한 사회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행위로 바라본다.
 
자본의 이해 대변하는 우파 언어도 불온하긴 마찬가지
 
지하철이나 국내 유수 대기업의 파업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 잡는 행위’(시민의 발을 볼모로 잡는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다.)라거나 ‘경제를 해치는 행위’, ‘파업 손실액 ○○억원’ 따위로 이해하는 언론이나 시민들의 사고는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철저히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파리 시민들은 지하철 파업을 ‘불편하지만 그들의 이해(利害)와 권리를 존중한다’고 이해했지만, 유학생 권영길의 눈에 지하철 청소부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쌓인 지하철 정거장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왜 대신 청소하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에 파리 지하철 노동자는 ‘그게 그들의 무기다. 우리에게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고 받았다. 이 노동자의 사고는 이른바 그들의 톨레랑스(용인) 이전에 금기가 없는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한 프랑스 사회의 공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군부 독재 시절에 정치적 경쟁자를 고사시키는 데 빈번히 사용된 가장 저열한 방법이 그의 사상을 빨간색으로 덧칠하는 것이었는데,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방법은 유효한 모양이다. 현 정부의 여러 정책이 좌파적(제발 그랬으면 좋겠다.)이고, 북의 사주를 받아 통치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보수와 우파의 논리로 당당히 행세하는 이 사회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불온하다. ‘왼쪽’이 정치적·사상적 균형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불온시하는 이 우파의 언어도 불온하기는 매일반인 것이다.
 
 

 2005. 9. 29 . 낮달

 

둘 : ‘노동’에 대하여

 
1995년 여름을 나는 대전 대덕구의 어느 대기업이 발주한 연구소 신축단지에서 막일을 하며 보냈다. 다섯 해 만의 복직 이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상과 삶의 부조화 때문에 몹시 괴로웠던 시기였고, 그 돌파구로 생각한 것이 자기 몸을 ‘몹시하는’(경상도에서는 ‘학대하다’는 뜻으로 ‘몹시하다’를 쓴다. ‘학대’가 가진 ‘직접성’의 의미는 다소 덜한 어휘가 아닌가 싶다) 일이었다. 몸의 고단함이 정신의 긴장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노동과 삶, 혹은 인간의 존엄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때로 괴롭기만 했던 저 ‘가르친다는 것’이, 그리고 이 낯설고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게 내게 희망이라면, 노동으로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있어 희망은 무엇일까 하고. 한 달간의 고된 노동이 끝나고 손에 쥐어지는 임금이 보장해 줄 손바닥만 한 여유인가, 혹은 그것으로나마 가난하게 이룰 수 있는 삶의 윤택인가.
 
내 노동과 저들의 노동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 노동이 먹물이 갖는 다소는 방자한 객기나 치기의 소산으로 한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노동은 비록 그것이 생존과 직결된다고 하더라도, 그 경제적 가치와 별도로 매회, 매일 완결되는 삶의 목적 같은 것은 아닐까.
 
거기서 만났던 몇 사람의 노동자를 통해서 나는 노동과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십대 중반에서 예순을 넘긴 사람까지, 일생을 막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 일하는 모습은 내게 일종의 감동을 주곤 했다. 그들은 같은 일용 노동자였지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이나 휴식과 노동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고강도의 체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일에도 막힘과 주저가 없었으며, 일할 때마다 그 일에 온전하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기 삶의 존엄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고, 때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고 저항하기도 했다. 작가 박경리 선생은 ‘토지’의 농민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지키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대덕의 노동자들을 통해 그 진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은 그들의 생계수단을 넘어 그들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 그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정직한 힘, 노동
 
농촌을 지키고 있는 고령의 노인들이 일상적인 농업노동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한 습관이나 파한(破閑)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인 탓이다. 농업노동은 노동의 주체인 자신을 성장케 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생명을 가꾸고 기르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으뜸의 노동이기도 하다.

▲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1992, 장산곶매)의 한 장면. 전교조 사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다.

 
공업 노동, 특히 포드 시스템으로 불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진행되는 분업 노동은 노동의 각 과정을 파편화·형해화(形骸化) 함으로써 노동의 결과물과 인간의 유리를 심화시킨다고 선생은 진단한다. 라인을 따라 전개되는 단순·반복적인 분업 노동은 로봇 등 기계화로 대체될 수 있는 성격의 노동이어서 부분적으로는 ‘기존의 일자리를 없애고 새로운 고용기회의 축소를 불러와 미래는 암울한 대량실업자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암울한 전망과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동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그 정직함에 있다. 그것이 닿는 순간, 무엇이든 가공되고 변형되고 창조된다. 노동으로 세상은 존재하고, 움직이며, 발전하는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사랑’과 ‘자유’와 함께 ‘노동’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는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2005. 11.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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