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찔레, 5월을 나눠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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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도시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장미꽃의 행렬은 장관이어서 장미가 온전히 ‘5월의 꽃’으로 등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그 내로라하는 원색의 장미 물결 사이로 내 산책로 주변에 찔레꽃도 만발하고 있다. 한때 나는 오월을 장미 대신 ‘찔레의 계절’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관련 글 : 장미보다, 다시 찔레꽃]
매일 같이 동네 뒷산인 북봉산을 오르내리던 때다. 산어귀에 핀 몇 그루의 찔레에 꽂혀서 나는 ‘장미보다, 다시 찔레꽃’이란 글을 쓰기도 했다. 찔레도 장미와 같은 낙엽관목이라도 신분으로 치면 둘 사이는 무척 멀다. 장미는 세계의 여러 장미를 원종(原種)으로 하여 만들어낸 원예 품종이지만, 찔레는 우리나라의 들장미로 들판에 자생하는 야생화인 까닭이다.
육종(育種)으로 태어난 장미는 사람의 기호에 따르느라 붉은색을 비롯하여 하양, 주황, 분홍, 파랑, 보라, 노랑, 검정 등 8가지 빛깔을 자랑한다. 그래서 장미는 온실에서 태어난 귀하신 몸인 셈이라 할 수 있지만, 산과 들의 기슭과 계곡의 양지 혹은 어느 곳에서도 절로 자라는 찔레는 자생하는 꽃이다.
화려한 빛깔로 피어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장미의 꽃말은 ‘사랑, 욕망, 절정, 기쁨,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한적한 산기슭과 골짜기에 처연히 피었다 져 아련하게 슬픔과 추억을 환기하는 찔레꽃의 꽃말은 ‘온화(溫和), 고독, 자매의 우애’라고 한다.
화려한 자태와 향기로 유명한 장미가 서구의 귀족 같은 꽃이라면 찔레는 그야말로 소박한 서민의 꽃이다. 그래서일까, 장미와 찔레의 꽃말도 그 정체성만큼이나 다르다.
서구에서 ‘장미’는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살아가는 권리’(빵과 장미)를 이른다.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 러트거스 광장(Rutgers Square)을 메운 1만 5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피켓을 들고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We want bread, But roses, too)!”라고 외친 데서 유래한 뜻이다.
그러나 이 땅의 고단한 현대사 속에서 찔레꽃은 ‘누나가 일가는 광산 길’에 하얗게 핀 꽃, 소년은 누나를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따 먹는 꽃이다.(이원수 동시 ‘찔레꽃’) 찔레꽃은 산 사나이로 죽어서 불혹의 막내에게 돌아오는 젊은 아비의 현신(이원규 시 ‘찔레꽃’)이다.[관련 글 : 장미와 찔레, 그리고 이연실의 노래들]
꽃이 주는 느낌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다. 한때는 배꽃이 좋았는데, 어느 해부턴가 그게 성에 차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장미보다, 다시 찔레꽃’을 쓸 때만 해도 내 마음은 찔레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섯 해가 지난 올해는 산책길에서 찔레와 장미를 만나면서 장미를 찔레의 아래에 놓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장미와 찔레꽃을 이르면서 굳이 그 우열을 가를 일은 없겠다.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장미는 장미대로, 소박하고 그윽한 하얀 꽃의 찔레꽃은 그것대로 아름답고 어여쁘니 말이다. 다만 찔레는 5월 한 달이 지나면 시들어서 지고 말지만, 장미는 첫서리가 올 때까지 계속 피니, 두고두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도 하다. [관련 글 : 2022년 11월, 만추의 장미]
벌써 이르게 핀 찔레는 시들고 있다. 그러나 장미도 일부는 시들어가지만, 새로 피는 꽃이 그 생기와 화사함을 이어간다. 유난히 장미를 심어 기르는 집들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장미꽃과 산어귀에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찔레꽃을 바라보면서 이 난만한 오월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2023. 5.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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