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의 어느 족벌 사학에서 일어난 폭력
아닌 21세기에 ‘이건 뭥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사학의 현실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이 땅의 사학이라면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경기도 평택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교장의 ‘교사 폭행’ 이야기다.
언론들은 저마다 이를 ‘교사 체벌’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는 그리 온당한 표현이 아니다. 교장이 교사들에게 회초리를 휘두른 행위는 ‘체벌’이 아니라 ‘폭력’이다. 언론이 이 사건을 그렇게 받아쓰고 있는 건 은연중에 ‘교장은 교사를 벌할 수 있다’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드러내서인지도 모른다.
실제 학교 관리자인 교장이 교사에 대한 상벌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체벌’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은 이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의 반응에서도 확인된다. 아이들의 반응이다. “화가 난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만, 교장 선생님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담임교사를 때리는 행위는 잘못이다.” 아이들 눈에도 ‘그건 아니었’던 것이다.
‘폭력’이 아니고 ‘체벌’이라고?
최초 보도에선 ‘남교사들을 칠판에 손을 대게 한 다음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후속 보도는 ‘여교사’도 예외가 아니었고, 남교사들은 ‘교실 바닥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얻어맞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교사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벌인 ‘엎드려뻗쳐’가 재현된 것이다.
“학생들 앞에서? 세상에!”
“아니 교장은 때렸다 치고 순순히 얻어맞은 교사는 또 뭐야?”
동료들의 반응도 경악 일색이긴 한데 어쩐지 씁쓸하기 짝이 없다. 멀리 경기도의 낯모르는 교사들이 당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순순히 얻어맞은 교사’를 나무란 것은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일 것이다.
20년도 전의 옛일이 떠오른 것은 그때다. 전국에서 이른바 ‘평교사’들이 궐기(!)하던 때다. 학교마다 평교사회가 만들어지면서 학교장이나 재단의 억압과 전횡에 짓눌려 살던 교사들이 교육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던 1988년 무렵이다.
지역 교사협의회(교협)를 꾸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성주에 있는 어느 사립학교 상황을 들었다. 퇴직 경찰 출신의 교주가 직접 교장으로 있는 학교였는데, 이 학교는 그야말로 ‘교장의 왕국’이었다. 교장은 교사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업계를 불러 ‘아무개 수업 빼!’를 지시했고, 해당 교사는 냉가슴 앓으며 며칠을 수업도 들어가지 못한 채 교장의 ‘하회’를 기다려야 했다.
운동장 조회가 열렸다. 아이들의 집합이 늦어지자, 교장은 직접 아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모두 돌려세운 다음, 운동장 끝을 뛰어갔다 오라는 ‘선착순’을 시킨 것이다. 아이들은 실실 웃으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교사들이었다. ‘전가의 보도’를 교장에게 빼앗긴 교사들은 멀뚱하게 아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이때 교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이들 따라 뛰어!”
몇 명의 교사가 뛰고 또 몇몇이 뛰지 않았는지는 말하지 말자. 그런 울분을 삭이던 교사들이 마침내 학교를 뒤집어 버렸다. 평교사회가 뜨고 분노한 교사들은 학교 안의 권력관계를 간단히 반전시켰다. 그것만으로도 학교는 정상화되었다. 교협 시절에 ‘인구에 회자되던’ 전설 가운데 하나다.
‘사학의 시계’는 여전히 90년대다
20년이 훌쩍 지난 옛일이다. 학교는 외형적으로 변화했고, 민주화된 부분도 많다. 그러나 변한 것은 외형이고 본질적 권력관계라든가, 지시와 복종의 체제 따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특히 재단이 교사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학의 시계는 여전히 9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여론은 ‘학생 앞에서’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교장의 행위를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의 어른’인 교장이 ‘철없는(!) 교사’를 벌할 수 있다는 ‘온정주의적, 봉건적 사고’가 온존하는 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겉으로는 부정하겠지만, 대부분의 사학 이사장이나 교장은 얼마든지 교사들을 나무라고 지도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폭행은 열성이 넘치다 일어난, 예기치 않은 행위일 뿐이다.
안타까워서 학생들 앞에서 교장에게 얻어맞은 교사들을 나무랐지만, 기실 그들도 피해자일 뿐이다. 교장의 폭행을 거부한 교사는 어깻죽지를 맞아 멍이 들었고 몸을 피한 여교사는 폭행을 면했다고 뉴스는 전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맞고 있을 수 있나, 하겠지만 여든 살이 넘은 교장, 그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교사들은 일찌감치 저항할 힘을 잃었을 터이다.
북한의 ‘권력세습’을 말하지만, 이 나라 사학에서 벌어지는 ‘세습’도 만만하지 않다. 예의 학교에서 교장은 40년이 넘게 교장 자리를 지켜왔고, 교장의 처와 딸은 각각 재단 이사장과 교감을 맡고 있다. 세습에다가 전형적 ‘족벌 사학’이다. 전교조 평택·안성 사립지회장의 말대로 “입 한 번 뻥긋 잘못하면 신분에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을 것이 예상되는 사립학교에서 누구도 학교 주인의 잘못을 쉽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경기도 교육청이 부랴부랴 재단에 이 교장의 중징계를 요청했지만 글쎄다. 현행 사립학교법에는 사립학교 교직원에 대한 인사권, 징계권이 해당 법인 이사회에 있다. 시도 교육청은 법인의 임원과 교장의 임면 승인권을 갖고 있을 뿐, 최종 결정권은 이사회의 몫이다.
교장의 처인 재단 이사장은 이사회를 소집해 이사이기도 한 남편의 중징계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고양이에게 맡긴 생선가게 격이다. 무려 41년 동안 교장으로 장기 재직해 온 ‘남편’이 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정상을 참작하라면 이사회의 선택은 뻔하지 않겠는가.
‘공익’보다 ‘사학의 재산권’을 앞세우는 나라
설사 교장이 중징계 처리된들 아이들 앞에서 교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짓밟힌 교사들의 상처는 어떻게 위무될 수 있을 것인가. 눈앞에서 교장에게 매 맞는 선생님을 목격한 아이들이 받은 상처와 혼란은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잘은 몰라도 이 학교 역시 교직원의 봉급은 국고의 ‘재정결함보조금’으로 지급될 것이다. 교직원은 물론이고 교장이나 교감의 봉급도 나라에서 지급한다는 말이다. 멀쩡한 직원들의 봉급을 국가에서 지급하면서도 정작 인사나 징계에 관한 권한에서는 찬밥 신세인 게 오늘날 시도 교육청의 위상이다.
그것은 비리로 물러난 상지대의 옛 재단 관계자들을 정이사로 선임한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맹신해 마지않는 권리, ‘사학의 재산권’ 탓이다. 이 나라의 제반 법률과 관행에서는 ‘교육의 권리’, ‘공익’보다 언제나 사학의 ‘재산권’이 앞선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 법원이 있는 한 이 재산권은 자자손손 계승, 발전되리라.
2010. 9.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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