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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가을의 끝, 천등산 봉정사(鳳停寺)

by 낮달2018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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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봉황이 나래를 편 천하의 명당

▲ 봉정사로 오르는 솔숲길 . 차는 이 길을 지나 절 코앞까지 닿는다 .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한 절이다. 그러나 그 역사만큼 기림을 받은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웃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부석사 무량수전으로부터 현존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 자리를 물려받은 극락전으로나 기억되던 이 절집이 대중들에게 새롭게 떠오른 것은 1999년 4월 영국 여왕이 다녀가고서부터이다.

 

유럽의 이 할머니 임금은 나중에 안동을 소개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안동 토박이들로부터는 그리 고운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여왕의 방문 이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 한적한 절집에 전국에서 불자들이 밀려오자, 봉정사는 그예 본사인 고운사조차 받지 않는 입장료를 징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게 여왕이 천등산 산행을 다니는 본바닥 사람들로부터 공연히 불편만 끼친 여인으로 매도당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추위가 오기 전에 사진이나 찍어 두자고 별러오다 지난 주말에 천등산을 찾았다. 짧아진 해 탓에 바삐 한 바퀴를 돌자고 입장권(1500원)을 사고 가파른 진입로를 올라 일주문 앞 공터에 주차했다.

 

토박이들에게는 천등산은 가장 무난한 산행코스의 하나이다. 지인들과 함께 십수 차례 천등산에 올랐지만, 입장권을 산 건 처음이다. 산행코스는 산문과는 다른 방향에 있는 까닭이다.

▲ 봉정사 일주문. 언덕을 넘으면 나타나는 이 문을 이완규는 '솟아오르는 일주문'으로 표현하였다.

주말이었지만 산사는 고즈넉했다. 일주문 앞에서 한 중년 여인과 딸인 듯한 30대 젊은 여인, 그리고 어린 손자가 나란히 합장배례하고 있었다. 해는 없었지만 어둡지 않은 상태. 눈으로 보이는 풍경보다 사진이 더 곱게 나올 수 있는 날씨인 듯했다.

 

창건주 능인(能仁)이 이 산의 바위굴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그의 도력에 감복한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천등(天燈)]을 내려 굴 안을 밝혀주었다 하여 이 산은 ‘천등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능인이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고 그 새가 머문 자리에 산문을 열었다 하여 ‘봉황이 머무른 절’, ‘봉정사’가 되었다.(인터넷의 일부 백과사전 등에는 이 설화의 주인공을 능인이 아니라 ‘의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글은 봉정사 누리집의 기록을 따랐다.)

 

그러나 풍수를 연구해 온 내 친구 이완규는 그의 저서 <안동 풍수 기행-와혈의 땅과 인물>(2001, 예문서원)에서 이 절 이름이 풍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안동에서 예천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천등산을 바라보면 마치 기와지붕 같은데, 이는 곧 ‘장대한 새의 날갯죽지’를 닮았으니, 우리 조상들은 이런 산을 새 중의 새, 봉황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절이 봉황의 품속에 들어앉았다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라며 이곳을 ‘봉황이 나래를 편 천하의 명당’으로 꼽고 있다.

▲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 규모가 크지도, 날렵하지도 않은 이 전각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한국전쟁은 이 절도 할퀴고 간 모양이다.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창건 이후의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이 절이 조선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堂宇)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한낱 말사지만 이 절집이 가진 문화재는 만만치 않다.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 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古今堂) 등 국보 하나에 보물은 셋이나 된다.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우왕 2년, 1376)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자리를 물려받은 봉정사 극락전(極樂殿)은 1972년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 봉정사 대웅전(보물 제55호). 조만간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을지 모른다.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4칸인 맞배지붕 건물인데, 기둥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다. 여러 개의 문을 연이은 보통의 법당과는 달리 앞면 가운데에 문을 달고, 양옆으로 창문을 낸 다소 낯선 구조다. 그래서인지 바로 옆 대웅전의 의젓하고 상승감 있는 모양새에 비해 궁색하고 온존해 보인다.

 

봉정사 누리집에 따르면 극락전은 ‘현존 최고의 목조건축물’ 자리를 대웅전에 내어주어야 할 듯하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 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된 것이다.

 

묵서에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이 기록에 따르면 대웅전 창건 연대는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라 한다.

▲ 만세루 위. 현판 앞에 물고기를 구원하고 수중 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린다는 목어가 보인다.
▲ 언덕 위의 영산암. 여기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등이 촬영되었다.

대웅전 오른편의 가파른 언덕에 영산암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동승(童僧)’의 촬영지로 알려진 이 암자는 ㅁ자의 공간 안에 우화루, 송암당 등 모두 5동의 부속 암자로 구성되어 있다. 조밀한 배치나 마당 한쪽에 납작하게 서 있는 반송(盤松)과 어우러진 영산암은 마치 무슨 여염집 같아 보인다.

▲ 영산암 송암당(松岩堂)의 마루. 이 마루는 왼쪽의 우화루와 이어진다.
▲ 봉정사 경내의 숲. 올 단풍은 맑거나 밝지 못하고 우중충하다. 날씨 탓이라 한다.

아래층에 출입구가 난 누각이 우화루(雨花樓)다. 석가세존이 영취산에서 도를 깨친 뒤 법화경을 처음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우화루 앞 공터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늦은 오후의 흐릿한 햇살 속에서 봉정사의 단풍 숲이 쓸쓸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일주문을 지나는 젊은 남녀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이제 가을도 막바지다.

컴퓨터를 켜 파일을 열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서둘러 정리하고 온 감정의 복기(復碁)처럼 느껴진다. 마치 몽환처럼 일주문 옆을 지나는 젊은 남녀의 실루엣이 아련하게 기억에 작은 파문을 던진다. 그렇다. 이제 가을의 끝이다. 그것은 감정의 사치를 더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일 터이다.

 

 

2006. 12. 10. 낮달

 

 

가을의 끝, 천등산 봉정사(鳳停寺)

봉정사, 봉황이 나래를 편 천하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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