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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촛불 2011, 안동

by 낮달2018 202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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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비준 반대 촛불집회

▲ 안동의 차 없는 거리에서 열린 한미FTA 비준 반대 촛불집회를 마무리하고 있다.

뉴스는 주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반대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고 전한다. <한겨레>는 서울 청계광장에 7천 명이 모였고, 부산·광주·대전 등에서도 동시 집회가 열렸다고 알린다. 서울 이외에 집회가 열린 도시는 대전, 청주, 전주, 순천, 목포, 광주, 대구, 창원, 양산, 김해, 울산, 부산 등지라고 한다.

 

집회 참가자 수효와 여론은 정비례하나?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효는 그 집회가 표방하는 주장의 진정성, 여론의 동조 등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 것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 말이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에 대한 주최 쪽과 경찰 쪽의 추산이 항상 일정한 오차를 갖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글쎄,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숫자를 가늠해 보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주최 쪽의 추산에 거품이 다소 끼는 것과는 반대의 이유로 경찰 쪽의 추산은 실제의 반영에 썩 미흡하다. 한쪽은 ‘이만한 숫자’를 으스대고 다른 한쪽은 ‘고작 그 정도’만 모였다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영하는 민심이나 여론은 역시 ‘일부’일 뿐이다. 판사 166명이 대법원장에게 ‘한미FTA 연구반 설치’를 건의했다는 것은 민심과 여론은 단지 아스팔트로 나온 대중으로만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지 않겠는가.

 

집회에 즐겁게 참여하는 게 나이 들수록 쉽지 않다. 가장 큰 적은 아이들 말대로 ‘귀차니즘’이다. 인구 16만의 소도시 안동에 ‘FTA 비준 반대’의 촛불이 켜진 것은 적어도 12월 3일 이전이다. 나는 거기 나가는 대신 12월 3일 대구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죽 촛불집회가 열렸지만 나는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제 오전에 지역의 시민단체 관계자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집중일 동참 부탁합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오리털 파카에다 목도리를 감고 도심의 집회 장소로 나갔다.

▲ 집회 참여 인원은 열두어 명에서 스무 명 안팎으로 늘었다.
▲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촛불을 든 손들이 참 안쓰러웠다 .
▲ 어떤 집회든 모범을 보여주시는 이 어른은 농민회장을 지냈다 .
▲ 70대에도 노익장으로 사자후를 잊지 않으시는 은퇴 목사님
▲ 소규모 집회다 보니 마치 가족 소모임처럼 집회는 정겹게 치러졌다.

안동은 2008년의 촛불집회를 무려 25일간 지속한 곳이다. 가장 많을 때 3, 4백이었고, 대부분 50명 안팎이 모인, 그리 힘이 붙지 않는 모임이었지만 지역의 활동가들은 그 집회를 한 달 가까이 끌고 나갔다. 절대 보수의 고장 안동에서 그런 운동을 펴낸 활동가들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절대 보수’의 고장에서 켠 ‘촛불’의 의미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5월이었지만 지금은 12월, 그것도 올들어 가장 추운 주말이다. 집을 나서는 것도 꽤 용기가 필요한데 도심의 시멘트 바닥에다 궁둥이를 붙이고 있어야 하는 일이니 ‘물어 무삼하리오’가 아닌가.

 

별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집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차 없는 거리로 불리는 도심의 공터에 모인 이들은 열두어 명. 시에서 세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차라리 외로워 보였다.

 

모인 이들의 면면도 그랬다. 모두가 내가 ‘폐계’라 부르는 ‘늙은이’들이다. 40대 서너 명을 빼면 모두가 50대 후반부터 70대에 이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쩌랴. 집회는 약 40분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장갑도 끼지 않고 촛불을 들고 있는 손들이 안쓰러웠다.

 

지역 농민회장을 지낸 일흔 가까운 어르신을 뵙기가 참 민망했다. 한미FTA 비준안이 날치기 처리된 날이든가, 그 이튿날이든가 대구에서 열린 규탄대회 맨 앞줄에 앉은 어른을 보았는가 싶었는데, 이 어른, 그날 서울에서 열린 집회 맨 앞줄을 지키고 계셨던 거였다.

 

은퇴한 70대의 목사님도, 명퇴한 60대 중반의 선배 선생님도 사자후는 그대로다. 아이들 몇이 지나가다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멀거니 집회를 지켜보다 총총 발걸음을 돌린다. 집회는 약식으로 진행되다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어째 전부 늙은이들만 모였지요?”

“그래, 젊은 친구들은 바쁘니까, 우리라도 모여야지.”

 

농과 안부를 주고받고 사람들은 서둘러 헤어졌다. ‘대포라도 한 잔’ 하며 붙들기에는 날씨가 너무 매웠다. 돌아와서야 어른들께 뜨뜻한 국물이라도 대접하는 건데 하고 후회를 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이는 스무 명 남짓. 인구 천만의 서울에 7천이 모였다니 16만 소도시에 스물이 모인 것은 일당백으로 쳐도 되지 않을지…….

 

 

2011. 12.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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