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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안동의 3·1 만세운동

by 낮달2018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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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

▲ 안동웅부공원에서 열린 3.1만세운동 재현 행사.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을 그 사건의 이름으로 삼는 전통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구’한 듯하다. 이 방식은 사건의 발생일만을 건조하게 표시할 뿐 그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매우 불편한 방식이다. 연도를 따로 표시하지 않으니 날짜만 달랑 떠오르는 데 글쎄, 그게 합리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저항에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두 달이 넘게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3·1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 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 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 투쟁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엠파스 백과사전)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은 비폭력의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일제는 이를 극악한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일본 측 발표를 따라도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수 7,509명, 부상자 수 1만 5,961명, 피검자 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3·1운동의 희생을 겨우 유관순 열사나 제암리 학살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우리의 상식을 찌르는 진실이다.

▲ 안동댐 부근 공원에 세워진 안동3.1운동기념비

안동의 3·1운동은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약 15일 동안 11개 지역에서 14회에 걸친 시위로 전개되었다. 안동에서의 첫 만세운동은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이 잡히는 바람에 1인 단독 시위로 끝났다. 이 시위의 주인공이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생인 이상동 선생이다.

 

2차 시위는 3월 18일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과 유림세력이 연합해 이루어졌다. 태극기와 격문이 나부끼는 이 시위에는 무려 2천5백여 명이 참여하였고, 닷새 뒤 3차 시위에는 안동면만이 아니라 다른 면민들도 참여함으로써 안동군 전체의 시위로 발전했다고 한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시위를 진압했고 안동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자위단을 구성해 여기 동참하였다. 분개한 안동사람들은 통치기관을 습격하자 일본 수비대가 실탄을 발사하여 3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안동에서의 만세운동은 표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군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전개 양상에서 격렬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168명의 실형 선고자 중에 7년 형과 6년 형을 받은 이도 있었고 3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이도 14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민족 대표 33인의 최고형이 정작 3년으로 한정된 사실에 비기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올해는 3·1운동이 여든아홉 돌을 맞는 해다. 2008년, 어느새 한 세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때로 교과서나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듯하지만, 기실 그 내밀한 진실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게 한다.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시대는 재일 조선인의 문제, 위안부 문제 등과 엉키어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독립운동의 성지로서 전국 유일의 시군 단위의 독립운동기념관을 열고 있는 안동에서 3·1운동을 기리는 방식도 다르다. 해마다 2월 마지막 날에 3·1운동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베풀어지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안동웅부공원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싣는다.

 

2008. 2.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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