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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몽골에 쫓겨 천도했지만, 고려 귀족들의 사치는 이어졌다

by 낮달2018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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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행 ②]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려 궁지(20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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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유수부의 동헌인 명위헌. 왼쪽에 수령 400년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고려궁지 뒤쪽 산비탈에서 내려다본 풍경. 멀리 강화읍 시가지가 보인다. 오른쪽은 외규장각, 왼쪽은 명위헌이다.
▲ 고려궁지의 안내판

성공회 강화읍 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사적 강화 고려 궁지(江華 高麗宮址)로 향했다. 고려 궁지는 성당 근처인 강화읍 관청리(북문길 42)에 있었다. 고려의 강화도 천도는 교과서를 통해 배웠지만, 그게 현실 유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낯선 느낌이다. 신라는 경주에, 조선은 서울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은 휴전선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무신집권기 몽골의 침략 대비 강화도 천도(1232)

 

강화 고려 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이다. 강화도 천도를 결정한 것은 당시 무신 집권기, 최고 집권자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1166~1249)였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압적으로 천도를 강행했다.

 

최우는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 군대를 강화에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과 관아 등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의 고된 공역을 통해 갖추어졌다. 1251년(고종 38)에는 국자감이, 1255년(고종 42)에는 태묘(太廟)가 세워져, 강화는 규모는 개경에 미치지 못했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노역과 전쟁으로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최씨 일가는 물론, 왕족과 귀족들도 피난 생활임에도 저택과 사원을 짓고 팔관회·연등회·격구·명절 등 사치 생활을 하였다. 무신의 난을 거쳐 무신 집권기에 왕권이 나락에 떨어질 때부터 이미 노쇠한 제국 고려는 위태하게 기울고 있었다.

 

강화에서의 무신정권은 최우의 아들, 손자인 최항(1209~1257)·최의(1233~1258)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몽 항전을 담당하면서 많은 시련을 겪은 최씨 정권은 화전(和戰)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전쟁으로 인한 사회경제적인 피폐로 크게 약화하였다. 결국 1258(고종 45)년에 김준과 유경 등이 최의를 제거하고, 최씨 정권을 타도하였다.

 

강화에서의 대몽 항전은 정권을 장악한 김준·임연·임유무가 집권을 이어가던 1270년까지 계속됐다. 강화에서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한 데 뒤 김준도 임연에게 암살(1268)되고, 임연과 그 아들 임유무가 정권을 이어갔으나 1270년 임연은 병사하고, 임유무는 살해되면서 1백 년간 유지되어 온 무신정권은 몰락했다.

 

강화경(江華京) 시대(1232~1270) 39년의 흔적 고려궁지

 

강화경(江華京) 시대는 1270(원종 11)년 5월 23일 관료들이 모여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몽골과 화의한 원종이 개경 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집권 당시 설치한 삼별초군(三別抄軍)은 개경 환도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며 강화도에서 원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1270년)이다.

 

결국 강화경 시대는 1232~1270년까지 39년 남짓이다. 고려 왕조가 28년간 머무른 흔적이 말하자면 고려 궁지인 셈이다. 강화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한다.

▲ 고려궁지의 남문이자 정문인 승평문.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조선시대에 지은 건물이다.
▲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공간인데 영조 때 명필 백하 윤순이 쓴 명위헌 현판을 달았다 .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쪽에 삼층으로 된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승평문의 위치는 현재보다 100여m 남쪽인 용흥궁 입구 부분에 있었다고 전한다. 강화의 고려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에 따라 모두 파괴하였다.

 

화의 뒤 몽골의 요구로 고려 궁궐은 파괴, 지금 남은 건 조선시대의 건물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여러 관청 건물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에 봉선전(奉先殿 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1636)에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년(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세웠다.

 

숙종 대에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고 1782년(정조 6)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했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웠다. 1964년 고려 궁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었다.

 

현재 고려 궁지의 면적은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기준으로 15,097㎡(약 4,566평)이지만 이는 실제 고려 궁지의 일부일 뿐이다. 현재 고려 궁지에는 조선시대 관아의 동헌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강화동종과 복원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궁지 앞 소규모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계단을 오르면 승평문이다. 고려궁지의 남문이자 정문인 승평문은 조선시대 경복궁의 광화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승평문은 문 3개 가운데 편액을 단 가운데 문은 닫혀 있었다. 그 문은 오직 임금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다. 관광객들은 양옆 문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 명위헌. 현판은 영조 때 명필 백하 윤순의 글씨다. 안에는 유수의 집무 광경을 마네킹으로 연출해 놓았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강화유수부의 동헌이다.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留守)가 업무를 보던 공간인데 영조 때 명필 백하 윤순이 쓴 ‘명위헌(明威軒)’ 현판을 달았다. 명위헌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에 복원 정비하였다. 건물의 왼쪽 부분을 수령 400년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가리고 있어 관청이라기보다 무슨 여염집 같았다.

 

명위헌 내부에는 동헌의 모습을 마네킹들이 재현하고 있었다. 중앙에 유수가 앉고 좌우에 도포 차림의 육방이 세 명씩 나누어 섰다. 유수부 안에는 육방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승평문 왼쪽의 이방청만이 남아 있다.

▲1782년 2 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했다 .

명위헌 뒤쪽 널따란 평지에 서 있는 건물이 외규장각이다.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했다.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3년 강화군에서 복원했고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의 의궤를 비롯한 책과 문서를 약탈해 갔다. 현재 건물은 강화군에서 복원,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

병인양요(1866년)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극동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규장각을 불태웠다. 이때 5000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프랑스군은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권의 책과 문서 및 은궤 수천 냥을 약탈하였다.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 의궤와 도서는 2011년에 돌아와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는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1975년 이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고 박병선(1923~2011) 박사는 우연히 이 도서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한국 정부는 프랑스에 반환을 요청했다.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프랑스 정부는 2011년 조선의 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 임대 형식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도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관련 글 : 직지(直指)금속활자이야기]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여닫는 것을 알릴 때 사용되었던 강화 동종은 외규장각 앞, 이방청 담과 이웃한 종각에 보관돼 있다. 병인양요 때 이 종을 훔쳐 가려고 갑곶으로 운반하다가 프랑스군은 종이 너무 무겁고 조선군의 추격을 염려하여 결국 갑곳리 중도에 종을 버리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종각의 종은 복제품이고 진품 강화 동종은 현재 강화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다.

▲ 강화동종을 보관하고 있는 종각. 동종은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여닫는 것을 알릴 때 사용되었다.
▲ 승평문 왼쪽에 있는 이방청. 실제 궁지에는 육방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 남은 것은 이방청뿐이다.

5월 초순인데도 볕이 꽤나 따가웠다. 승평문 앞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잠깐 생각했다. 수도가 개경에서 강화로 와서, 그래서 강화 사람들은 좋았을까. 왕궁이 제 고을에 와서 좋았던 이들보다는 삶이 더 고달파진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강화경 시대의 흔적들 관광자원으로

 

39년이나 머문 왕궁과 귀족들 뒤치다꺼리를 담당한 것은 강화의 백성들이었을 터다. 왕의 거처가 들어서면서 백성들에겐 금기도 더 늘어났을 테고, 왕궁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는 것도 힘겨웠을 것이다. 수도를 버리고 섬으로 천도해서도 왕족과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이어갔다니 그들의 사치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노역과 희생을 딛고서 이루어졌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만민평등의 세상, 공화제의 시대다. 강화도는 다리로 이어져 뭍과 다르지 않고, 8백 년 전 피난 왕조의 흔적은 관광자원이 되었다. 강화 사람들이 행여 관광산업으로 누리는 작은 편익들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저 중세의 선인들이 고단한 세월을 받쳐주어서일지도 모른다.

 

 

2022. 8. 8. 낮달

 

[강화도 여행 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성공회 강화읍 성당

[강화도 여행 ③]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강화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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