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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고인돌, 삼천 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들

by 낮달2018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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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여행 ③]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강화고인돌(20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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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부근리 고인돌 공원. 초지 중앙에 사적 137호 고인돌. 왼쪽에 있는 건물이 강화역사박물관이다. ⓒ 강화군
▲ 강화 고인돌 공원의 안내판. 강화고인돌 전체를 소개하고 있다.

강화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강화고인돌을 선택한 것은 남은 시간과 거리, 소요 시간 따위를 고려해서였다. 고려 궁지를 나설 때쯤 이미 해가 한 뼘은 기울어졌고, 돌아가는 시간과 관광객들이 강화를 빠져나가는 시간 등을 잰 끝에 고른  여정이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사적 137호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하점면 일대 40여 기의 고인돌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대표하는 고인돌로 알려진 지석묘다.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낮은 구릉 저편, 풀밭 속에 서 있는 거대한 고인돌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우선 눈에 뵈는 건 거대한 고인돌 하나밖에 없는데, 이 일대가 고인돌 공원이란다.

 

2000년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2000년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우지만, 실체로서 고인돌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 거석기념물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걸쳐 분포해 있는 나라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한국의 고인돌은 고창, 화순, 강화 세 지역에 나뉘어 있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고인돌이 “한 지역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형식의 다양성과 밀집도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고 “고인돌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 및 동북아시아 선사시대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산”이라고 지적했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부근리 고인돌(사적 137호).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의 대형 고인돌이다.
▲ 하점면 일대 40여 기의 고인돌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대표하는 고인돌로 알려진 부근리 고인돌
▲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록한다는 증서의 동판.

강화 고인돌 유적은 연안의 섬 강화도 산기슭에 있다. 강화의 고인돌은 다른 유적들보다 높은 지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고창과 화순보다 초기의 형태가 많은데, 부근리와 고천리의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해 있다. 표고 280m의 높은 곳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화순·고창의 고인돌과 달리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것도 특징이다.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의 대형 북방식 고인돌 부근리 고인돌

 

부근리 고인돌은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의 대형 고인돌로 탁자 모양의 북방식 고인돌이다. 부근리 일대에서 민무늬토기 조각과 간돌검 등이 출토되므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덮개돌, 받침돌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나 묘실을 구성했던 판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형태가 웅장하여 제단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이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강화군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 하점면과 양사면으로 이 일대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고인돌은 땅 위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북방식이지만, 부근리 일대엔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 있다. 부근리의 고인돌은 아직 발굴조사 전이라 관련 유물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하점면 삼거리 유적에서 탁자식 고인돌 5기를 발굴했을 때, 돌방[석실(石室)]안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간 돌칼[마제석검(磨製石劍)], 돌가락 바퀴[방추차(紡錘車)], 달도끼[환상석부(環狀石斧)] 조각 등이 나온 적이 있고 고인돌 언저리에서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점 나왔다. 따라서 부근리 고인돌에도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고인돌은 기원전 2000~1000년 사이에 세계 곳곳에 지어진,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석문화의 발현이다. 전북 고창의 죽림리 고인돌군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존재했다가 기원전 3세기에 고인돌 건설이 중단되었다. 화순 고인돌은 이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6세기~5세기경에 만들어졌다. 강화 고인돌군은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부근리 고인돌 공원 옆에 최근 조성한 강화역사박물관이 있다. 어린이날이라 부모의 손을 잡고 나들이 온 아이들이 많았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나는 풀밭 가장자리의 통로를 따라 부근리 고인돌로 갔다. 멀리서 볼 때도 커 보였지만,  가까이 보니 정말 거대한 돌 구조물이었다.

 

기원전 7~10세기, 저 큰 돌 아래 돌방 속에서 영면한 인물은 누구였나. 그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적 세력을 확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사람들은 이 높은 곳에다 그의 무덤을 짓기로 하고, 저 거대한 돌을 어디에선가 옮겨온 것이다. 그걸 옮기는데 드는 품과 시간 따위를 고려하면 웬만한 경제적 능력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대 역사였을 것이다.

 

원형의 철제 울타리 안에 잘 보전된 고인돌은 그러나 덮개돌 아래 만든 묘실의 판석은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거기 묻힌 사람의 유해도 남아 있지 않다. 적어도 삼천 년 전에 거기 묻힌 사람의 흔적을, 그것도 묘실이 드러난 상태라면 찾을 도리가 없다.

▲ 무려 삼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근리 고인돌. 덮개돌 아래 만든 묘실의 판석은 사라졌다.
▲고인돌 공원에는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 주변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 수십 톤 무게의 덮개돌로 이루어진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 유적이다.
▲ 강화 고인돌군의 조성연대는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7세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 부근리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로 근처에서 민무늬토기 조각과 간돌검 등이 출토되므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 고인돌 공원에는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하나 나머지 고인돌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강화고인돌은 한강하구에 해당하는 고려산 북쪽과 별립산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은 지금은 바다에서 먼 곳에 있지만, 오늘날 강화도의 들판은 대부분 간척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해안가 언덕에 조성한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고인돌 공원에는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 주변, 해발 50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사적 137호뿐이다. 평지에는 사적 제 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와 탁자식 고인돌의 고임돌로 보이는 석재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솔밭에 덮개돌 밑에 고임돌이 없는 고인돌인 개석식(蓋石式 :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은 형식을 말한다. 받침돌이 없이 바로 무덤방을 덮은 것으로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도 한다.) 고인돌 3기가 지어져 있으며, 동쪽 낮은 구릉에는 탁자식 4기와 개석식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서 가 보지 못했다.

 

강화고인돌은 이 밖에도 내가면 오상리(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6호), 강화 대산리 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2호) 등에도 있다. 이들 지역에도 탁자식과 개석식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이 고인돌에서 여러 형태의 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무너진 고인돌은 복원하는 등의 관리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강화고인돌 참조]

▲ 강화 내가 오상리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6호) ⓒ 강화군
▲ 강화 대산리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 강화군
▲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2호)  ⓒ 강화군

유네스코는 장례 및 제례를 위한 거석문화 유산인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세계의 다른 어떤 유적보다 선사시대의 기술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관련 글 :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또, 세 지역 모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고 다양한 형태와 유형의 고인돌을 통해 거석문화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채석장의 존재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과 성격을 비롯해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유산의 완전성에도 이바지한다고 평가했다.

 

또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거대한 규모의 석조 유적이기 때문에 변형이 쉽지 않아 장기 보존이 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대부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세 지역의 고인돌은 모두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와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고인돌 유적의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은 문화재청이다.

 

고인돌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고인돌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화재와 주변 환경의 훼손이다. 화재 예방을 위해 매년 잡목 제거 작업을 하고 있으며, 삭토나 수목의 뿌리로 인해 무너진 고인돌에 대해서는 학술 발굴조사를 통해 정비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김해 지석묘는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에 350t 정도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 고인돌이다. 2007년 발굴 조사 모습. ⓒ 김해시

김해의 ‘고인돌 참극’

 

그러나 최근 김해에서 일어난 ‘고인돌 참극’은 고인돌의 보존과 관리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경남 김해시 구산동 가락국 유적 인근에 있는 거대 고인돌 묘역(경남 기념물 280호)을 복원 공사를 벌이던 업체가 훼손했다. 고대 김수로왕 가락국 창건 신화와 연관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지석묘) 유적을 복원한다면서 갈아엎어 버리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관련 기사 : 한국의 세계 최대 고인돌포클레인 3대가 밟았다]

 

고인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 시민들이나 개발업자에겐 고인돌이 하찮은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김해 지역에서 빚어진 고인돌 참사는 바로 그런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됐다. 고인돌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서는 지역사회에 대한 고인돌 홍보와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공원 옆 강화역사박물관에는 따로 들르지 못했다. 역시 돌아갈 시간이 촉박해서다. 다음에 또 오면 된다고 우정 중얼거리지만, 그 ‘다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강화도엔 못다 본 유적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곳도 많다. 해가 바뀌기 전에 한 번 더 강화를 찾을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면서 우리는 강화를 떠났다.

 

 

2022. 8. 10. 낮달

 

[강화도 여행 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성공회 강화읍 성당

[강화도 여행 ②]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려 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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