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보내준 권주시 한 편, 그리고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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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박(朴)이 카톡으로 한시(漢詩) 한 수를 보내왔다. 제목은 권주(勸酒), 우무릉이라는 이가 쓴 시다. 뜬금없이 웬 권주냐고 되받으면서 시를 읽는데, 그 울림이 썩 괜찮다.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알아보니 우무릉(于武陵·810~?)은 당나라 때의 방랑 시인이다.
‘금굴치’는 손잡이가 달린, 금색을 칠한 잔이라고 한다. 그 한 잔 술을 권하면서 화자는 상대에게 사양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예사로운 듯하지만, 뒤의 두 구절 뜻이 이래저래 밟힌다. 꽃필 때면 늘 비바람 거세고, 인생살이 이별도 많다…….
때마침 꽃이 피는 때다. 교정의 홍매화가 어저께 봉오릴 맺더니 어느새 연분홍 꽃잎을 열었다. 별관 처마 밑에 바투 심어 놓은 동백도 그 짙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다. 그저께부터 날씨는 20도를 넘는 완연한 봄인 것이다.
마땅히 꽃샘추위라 할 만한 추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시기니 20도를 넘기는 날씨를 믿어서만은 안 된다. 언제 새초롬해져 궂은비를 뿌리거나 꽃샘바람을 몰고 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분주한 몸놀림을 바라보면서 봄이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걸 확인한다. 깨어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풍경들도 시나브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출퇴근길에 걸어서 넘는 산등성이와 고갯길의 잿빛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 무채색의 풍경이 배고 있는 것은 아주 미묘한 꿈틀거림, 손을 놓으면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어떤 낌새다. 길섶에 드문드문 자라는 쑥 따위의 새싹도 미구에 숲을 오종종하게 가득 채우리라.
그러나 오는 봄과 피어나는 봄기운과 무관하게 나는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하다. 새로운 학년도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새로 만난, 내게 문학을 배우는 2학년 문과 4개 반, 독서와 문법을 배우는 3학년 이과 두 개 반 아이들과도 엔간히 호흡을 맞추어가고 있긴 하다. 방송고도 입학식을 거쳐 새로 3학년 38명의 새 얼굴과 만났다.
그러나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마치 초임 시절의 그것처럼 막연하고 낯선 느낌에 나는 잠깐 망연해지곤 하는 것이다. 지금껏 수십 년 동안 되풀이해 온 일상이거늘, 도대체 무엇이 이리 불편하고 낯설까.
수업과 수업 준비, 각종 업무 처리 외에 남는 자투리 시간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퇴근해서도 마찬가지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거나, 신문을 읽다가 이내 자리에 들어버린다. 예전처럼 블로그 글쓰기에 쫓기는 느낌도 없다.
설 대목 밑에 다녀온 북해도 기행, 친일 문인 이야기 등 몇 편은 글도 초를 잡다가 말았다. 도통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까닭이다. 써도 그만이고 쓰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간은 외려 더디 가기만 한다.
그래서다. 복사꽃이 필 때쯤 오라는 친구를 찾을 4월을 기다리기로 하는 것은. 꽃가지 꺾지는 못하더라도 벗들과 함께 복숭아꽃 그늘에서 나눌 권주의 시간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비바람쯤이야 피는 꽃으로 갈음할 수 있으리라고 우정 생각하면서.
2014. 3. 20. 낮달
4년 전 이맘때에 쓴 글이다. 출퇴근길에 만난 매화, 그리고 벗이 보내준 한시를 이야기하면서 막연하고 낯선 느낌, 불편함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태 후 나는 학교를 떠났다. 자유인으로 산 지, 세 해째. 그래서일까. 새로 읽는 우무릉 시의 울림이 더 그윽해지는 느낌이다.
꽃필 때면 늘 비바람 거세고, 인생살이 이별도 많다……. 누구나 일상에서 무심히 겪는 일이겠으나, 그걸 입에 올리는 순간에 비로소 삶은 그 모습을 낯설게 드러내는지 모른다. 비바람쯤이야 피는 꽃으로 갈음할 수 있다고 쓰긴 했지만, 삶은 그게 늘 상쇄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다.
2019.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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