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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순박한 민얼굴’, 화전리도 변했다

by 낮달2018 201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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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산수유 마을’ 화전리의 변화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산수유꽃 축제가 열리고 있는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숲실마을. 이번 주가 아마 절정을 이룰 듯하다.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숲실마을의 산수유를 보고 와서 첫 기사를 쓴 때가 20074월이다. 그 첫 기사의 제목을 나는 순박한 민얼굴의 산수유 마을 '의성 화전리'”라고 붙였다. 산수유 마을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마을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전리 산수유마을은 '관광지'가 아니다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 밀려드는 관광객을 겨냥해 서투른 분칠을 거듭하면서 망가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화전리에는 러브호텔은 물론 음식점도 하나 없다동전 한 닢 떨구지 않고 왔다 가는 상춘객들을 위해서 마을에서는 환영 펼침막을 걸어 두었고마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성가실 법도 한데주민들은 이 '든 사람들'을 덤덤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화전리가 여전히 순박한 민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산수유'를 빙자한 시끌벅적한 '축제'가 꾸려지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이 마을이 가진 미덕이다그러나 이 미덕도 조만간 '개발'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듯하다화전리가 지난 2월 행정자치부가 주관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사업 대상 마을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의성군은 올해 기반조성 사업으로 주차장생태탐방로마을 쉼터공중화장실포토존전망대 등을 조성할 예정이라는데 그런 '개발'의 이익이 정작 지역 주민들을 배제하고 '업자'들의 배만 불리면서 마을은 망가지고 마는 예를 떠올리는 것은 기우만은 아니다.

 

기사 <순박한 맨 얼굴의 산수유 마을, '의성 화전리'중에서

 

그리고 지난 주말(42), 4년 만에 숲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지지난해부터는 입소문을 타면서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마을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의 길목을 막아놓아서 사람들은 셔틀버스로 마을에 들어가야 했다. 게으른 데다가 그런 절차가 성가셔 나는 마을을 다시 찾는 걸 한동안 포기하고 있었다.

 

한물’일 거라 갔지만 산수유는 아직’

 

지지난 주에 화전리를 찾은 사람들이 꽃 없는 꽃 잔치로 헛물켰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나는 다음 주는 끝물, 이번 주가 한물일 것이라고 어림잡고 있었다. 네 해 전 화전리를 찾았을 때가 끝물의 산수유였다. 끝물의 산수유는 빛깔도 바래지만 꽃잎도 원래의 정갈한 형태를 잃어서 신선미가 떨어진다. 나는 은근히 그런 점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지난 2월 교직을 떠난 친구가 터전 삼은 의성 어느 골짜기. 텐트 친 자리에 언제쯤 집이 들어설까.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난 것은 세 시가 가까워서였다. 모처럼 나선 길, 나는 두 가지 일을 치를 작정이었다. 우선 시골에 집 짓고 살기 위해산 의성군 금성면의 한적한 골짜기에 밭을 일구러 들렀다는 벗을 만나는 일이 먼저였다. 지난 2, ‘담대하게학교를 떠난 친구는 요즘 의성 골짜기에 들러 밭을 일구는 일로 소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벗의 귀거래사

 

초행이었지만 우리는 이내 벗의 밭을 찾을 수 있었다. 10여 호 조그만 마을의 나지막한 뒷산이 그가 손수 흙집을 짓고 살겠다는 터전이었다. 원래 복숭아밭이었는데, 베어낸 집터 쪽에 울긋불긋한 텐트 하나를 쳐놓고 그의 식구들은 시방 밭을 일구는 중이었다.

 

글쎄, 집터의 길흉이나 방위를 보는 능력은 없지만,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은 아늑하면서도 시원했다. 벗은 거기에다 조립식 주택을 하나 세우고 그걸 언덕 삼아 흙집을 하나 짓겠다는 거였다. 시간은 갈무리하지 못할 만큼 많으니 그깟 소박한 소망 하나를 이루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아내는 밭 주변을 돌며 나물을 캐고 나는 친구의 만리장성계획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남은 복숭아나무는 올해만 그대로 두고 내년에는 베어낸다. 밭 끄트머리에 물길이 있는데 그걸 끌어들여 연못을 하나 파겠다. 연못 옆에 평상도 하나 놓겠다……. 좋은 일이다. 집이 지어지면 가끔 들러 놀다 가는 일이 내 몫일 테니까.

 

친구의 밭을 떠나 숲실마을에 닿은 때는 오후 네 시가 겨워서였다. 예년처럼 길목에서 차를 내려 셔틀버스를 타는가 했는데 어럽쇼, 차는 마을 앞까지 단숨에 들어갔다. 방문객들보다 훨씬 많은 안내요원이 친절하게 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몇 마지기의 밭을 아예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단,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나쁘지 않았다. 주차장 뒤편의 오래 묵은 산수유나무의 노란 꽃그늘이 희미했다. 역시 산수유가 만개하도록 날씨가 돕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눈치챘다. 끝물을 경계한 건데 우리는 조금 일렀던가 보았다.

 

마을 앞 길가에는 축제장에서 흔히 뵈는 뾰족한 지붕을 한 하얀 천막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 더는 이 산수유 마을이 민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든 뭐든 이 마을에도 개발의 손길이 미쳤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주차장 옆에 선 간이화장실에 들른 아내는 기함했다. 밀려오는 인파를 감당할 만큼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코앞의 공터에 세워진 간이화장실은 훌륭했다. 음악이 흘러나왔고, 잘 청소된 실내는 정갈했고, 악취 대신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다.

 

마을로 드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시멘트 포장의 찻길이고 나머지는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시내를 따라 낸 길이었다. 예전 같으면 논두렁길이었겠지만, 이 마을에 다다른 개발 덕분에 시멘트 구조물을 징검다리처럼 박은 널찍한 길로 바뀌었다.

 

역시 때가 좀 일렀다. 마을을 감싼 낮은 산비탈, 시내 길, 들녘에 가지런히 서 있는 산수유는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 노란 빛의 세는 사뭇 약했다. 시냇가의 산수유도 활짝 핀 놈보다 이제 갓 꽃을 피우는 녀석이 훨씬 많았다. 역시 여러 꽃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경이 제격인 산수유니 아쉬움은 오래 남는다.

 

마을로 드는 긴 시냇가에 줄지어 선 산수유 꽃그늘을 따라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만그만하다. 나이든 노부부, 커다란 사진기를 둘러멘 젊은 연인들,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내외들, 여고 동창생쯤으로 보이는 지긋한 나이의 여인네들……. 이는 급격히 진보한 2011, 한국사회의 여가선용의 방식인 것이다.

▲ 마을 어귀의 '할매할배바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이 바위에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 마을 안마당의 산수유나무. 잘라낸 자리에 못이 박혔다. 현수막을 단 흔적 같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지난번 방문 때는 보지 못했던 낯선 팻말 하나가 시야를 막는다. ‘할매·할배 바위’. 시내 건너편 산기슭에 기암 아래 나란히 선 남근석을 닮은 바위 두 개가 사이좋게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이 바위에 새끼를 두르고 풍년과 안녕을 빌었단다.

 

마을 안마당에 이르자 예전에 보지 못했던 표석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숲실마을화전리도 아닌 산수유마을이다. 표석 뒤편으로 몽골사람들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를 닮은 뾰족지붕의 천막 여러 동이 보이고, 농산물과 음식물을 파는가 본데 구수한 부침개 냄새가 건너온다.

 

변하긴 했지만  서투른 분칠은 아니다

 

그러나 마을은 적막했다. 너와(너새)를 얹은 흙담 위에 올라선 수탉이 우렁차게 울어댔다. 그러나 마을 안마당 천막에서 들려오는 두런대는 소리는 오히려 마을의 적막을 심화하는 듯했다. 경로당에서 나온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길을 가로질러 갔다.

 

해가 한참 서편으로 기울었다. 우리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에 당파를 좀 사 갈까 했는데, 주차장 못미처 파밭에서 쪽파를 팔던 아낙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해가 설핏 기울어서인지 주차장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이리저리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다. 마을 뒷산에 올라 꽃그늘로 뒤덮인 마을을 바라보지 못한 것도 걸린다. 그러나 다시 이 마을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주중에 들를 수만 있다면, 나는 평일 시간표를 머릿속에 불러냈다가 지워버렸다.

 

동네 입구의 천막에서는 음식물을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내에게 저녁을 먹고 갈까 물었더니 그냥 가잔다. 글쎄, 선객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음식물들은 합격점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손이 들이밀더라도 준비되지 않은 음식물이 익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난번만 해도 민얼굴이었는데 화전리도 제법 변했네.”

 그 정도 변한 건 봐 줘야 하는 거 아니우? 입구와 마을 안에 천막 몇 개 친 게 단데……. 참 시냇가 길에 돌 박아 넓혀 놓으니 좋더만, .

 

맞다. 그 정도의 변화라면 네 해 전에 우려한 서투른 분칠의 범주에 넣는 건 지나치겠다. 찾아오는 이는 많고 요기나 입맛 다실 데도 마땅찮으니 길을 넓히고 주차장을 만들고, 천막 음식점을 연 것은 손님에 대한 배려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외려 종일 드나드는 외지 손님들 때문에 잠시도 조용할 날 없는데도 덤덤하게 손들을 바라보는 마을의 점잖은 농민들을 치하하는 게 마땅하다. 4월인데도 여전히 으스스한 봄날, 땅거미가 지는 산수유마을 떠나면서 우리는 다시 내년을 기약했다.

 

그리고 다시 나흘이 지났다. 지금쯤은 화전리의 산수유는 절정을 맞았으리라. 마을을 포위하듯 둘러싼 산수유의 꽃그늘을 그려보는데 난데없이 일본에서 불어온다는 방사능 섞인 바람 소식이 들려온다. 내일모레엔 남부지방에 폭우가 내린다는데 화사한 꽃그늘에 방사능비라니 4월은 어째 생뚱맞고 잔인하기만 하다.

 

 

 

2011. 4. 6. 낮달

 


‘맨 얼굴’이 아니라 ‘민얼굴’이다

 

2007 4월에 <오마이뉴스>에 쓴 화전리 산수유 관련 기사(순박한 맨얼굴의 산수유 마을 '의성 화전리')에서 나는 '맨 얼굴'이라고 썼다. 이 글을 새로 정리해서 올리는 과정에서 '아래아 한글 2018'의 맞춤법 기능은 이게 그릇된 표현이라며, '' 대신에 ''으로 쓰라고 표시해 주었다.

 

 머리를 갸웃하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 나는 겸연쩍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맨 처음’, ‘맨 꼴찌처럼 띄어 쓰는 은 관형사로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이라는 뜻이다. ‘맨입’, ‘맨발처럼 붙여 쓰는 -’ 일부 명사 앞에 붙어, ‘다른 것을 더하지 않은의 뜻을 더하는 말.”로 접두사다.

 

 내가 쓴 맨 얼굴은 띄어 쓸 수도, ‘맨얼굴처럼 붙여 쓸 수도 없는 표현이다. 명색이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택도(!) 없는이라는 엉터리 표현을 쓴 것이라는 얘기다.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다.

 

 아래아 한글이 추천한 은 어떤가. ‘민낯이나 민머리처럼 일부 명사의 앞에 붙어, ‘꾸미거나 덧붙인 것이 없는의 뜻을 더하는 말”, 즉 접두사다.

 

 의성 화전리를 일러 순박한 맨얼굴이라 한 것은 나들이객들이 꾀지만 분장하지 않은 시골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면 거기 걸맞은 표현은 민얼굴이다. 익숙한 민낯에 비교해 다소 낯설긴 하지만, 그게 맞는 표현인 것이다.

 

 ‘아래아 한글 2018’의 맞춤법 기능은 맨 얼굴 맨얼굴 모두 붉은 금이 쳐지지만, ‘민얼굴 아래는 깨끗하다. 제대로 된 문서편집기로 한글 공부를 새로 한다고 한 게 과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래저래 나는 내 밑천이 시원찮다는 걸 깨끗이 인정하고 새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9.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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