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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2009년 3월, 의성 산수유 마을

by 낮달2018 2019.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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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숲실마을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산수유 축제가 열리고 있는 화전리 마을이 아닌 외진 마을에도 산수유 꽃그늘은 넉넉하기만 하다.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花田里) 숲실마을에서 베풀어지는 산수유 축제는 어제가 절정이었나 보다. 아주 가볍게 다녀오리라고 아내와 함께 나선 길이었는데 어럽쇼, 화전리 입구도 못 가서 차가 막혀 버렸다. 정체로 막힌 게 아니라, 축제 관계자와 교통경찰에게 막힌 것이다 [관련 기사 :  순박한 맨얼굴의 산수유 마을 '의성 화전리']

 

화전리 앞길은 일방통행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산수유꽃을 보러 온 상춘객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천변이나 인근 초등학교에 차를 세우고, 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로 화전리까지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늘 그렇듯 우리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해마다 구경하는 산수윤데, ……. 우리는 화전리로 가는 길을 버리고 곧장 뻗은 길로 내처 달렸다. 사곡면은 그렇지 않아도 산수유 천지다. 의성읍을 넘어서면서부터 아예 가로수조차 산수유로 바뀌어 있고, 웬만한 산기슭마다 노란 산수유꽃 그늘이 소복했다.

▲ 산수유 열매. 지난해 맺은 것이라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해졌다.
▲ 산수유 꽃그늘마다 파랗게 자라는 것은 마늘이다. 한지형 의성마늘의 품질은 유명하다.

우리가 사과밭 사이로 난 농로를 거쳐 이른 냇가는 사곡면 음지리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물이 말라버린 널찍한 시내 저편 산기슭에 다랑논이 차곡차곡 이어졌는데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산수유 꽃그늘이 흩어져 있다. 시내 이편 둑으로도 산수유가 일렬로 달리고 있었다.

 

아내는 과도를 꺼내 들고 시냇가 비탈에 주저앉아 쑥을 뜯기 시작했고 나는 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둑에 선 산수유나무에는 지난해 수확하지 않은, 수분이 빠져 쪼글쪼글해진 산수유 열매가 오종종하게 달려 있었다. 양도 적지 않은데 왜 수확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대학 공부까지 시킨 산수유 농사다. 10여 년 전부터는 산수유 씨를 기계로 발라내지만, 그 이전에는 이로 씨를 발라냈다고 한다. 그래서 화전리 노인들의 닳고 비뚤어진 이는 바로 그 같은 고단한 삶의 증거이다.

 

산수유 열매를 몇 날 며칠 까면서/이빨에 그만 붉은 물이 들’(<홍니>)어 버린 지리산 아래 구례 산동마을의 처녀들을 노래한 건 안도현이다. 경상북도 의성과 이웃한 예천 사람이지만, 의성 화전리에는 가보지 못했던가, 그는 눈 내리는 날이면’ ‘구례 산동 마을 옛 처녀들 보고 싶어진다고 노래한다.

 

 산수유꽃만 노란 게 아니라, 그 나무 그늘조차 노랗다고 노래한 이는 문태준이다. 그는 나무 그늘이 나무의 또 다른 한 해 농사라고 말한다. 그늘 농사는 산수유나무가 짓는데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지는 것이다. 그 그늘을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로 여기는 시인의 마음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정작 삶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박남준 시인은 폭죽처럼 터뜨리며 피어난’ ‘노란 산수유 꽃을 보는 처연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눈 밝은 시인은 노란 산수유 꽃에서 시름 많은 이 나라 햇나락을 보고 추수 무렵 넋 놓은 논배미의 살풍경을 읽는다.

 

살풍경(殺風景)’이 가슴에 아프게 새겨진다. 한미 FTA를 구원의 징표처럼 떠받드는 이 땅의 잘난 정치인들의 조바심이 농민들의 마음과 농촌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래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다 봄이 아닌 날인 것이다.

 

▲ 의성 마늘. 한지형의 육쪽 마늘이다.

산수유 꽃그늘이 드리워진 밭에 파랗게 펼쳐진 것은 마늘이다. 그 유명한 한지형 육쪽마늘이다. 단단하고 저장성이 좋으며 특유의 향과 강한 매운맛은 의성 마늘의 자랑이다. 이 마늘을 이용해 만든 사료로 기른 돼지고기가 마늘 포크. 마늘은 천연 항생제 역할을 하니, 말 많던 항생제 남용을 마늘로 해결한 셈이다.

 

보통 돼지고기보다 사람 몸에 해로운 콜레스테롤 함유량이 15% 낮고 불포화 지방산은 12%가량 높은 의성 마늘 포크는 소비자 시민의 모임에서 선정하는 우수 축산물 브랜드 인증을 2003년부터 3년 연속 받았다. 농림부가 주관한 축산물 브랜드 경진대회에서도 2004년부터 3년 연속 우수상을 받았으니 그 품질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겠다.

 

의성 마늘을 사료로 먹인 한우 브랜드 의성 마늘소도 만만찮은 인기를 얻고 있으니, 마늘은 의성 특산으로서 그 위상을 새롭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2000년 마늘 파동에서 드러났듯 여차하면 농촌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 축제 철이어서인지 찻길로 다니는 관광버스가 많다.
▲ 아직 봄은 이른가. 냇가에 자란 쑥은 아직 어리기만 하다.

저편 찻길로 관광객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가 짬짬이 지나갔다. 마을과 다소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사위는 정적에 잠겨 있다. 이 한낮의 정적이 어쩐지 마음에 아리게 다가온다. 산 너머 화전리 숲실마을은 도회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로 넘칠 것이다.

 

그들은 마을의 정적을 헤집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며 한 주의 피로를 씻는, 최고·최상의 주말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땅과 사람들이 맞닥뜨린 고단한 세월과 그 아픔을 아는 건 쉽지 않으리라.

 

서둘러 산수유 어우러진 시내를 떠나면서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산수유 씨를 발라내다 이가 닳아버린 화전리 노인들은 얼마나 살아 계실까. 산수유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대처에 뿌리내린 화전리 사람들에게 숲실마을은, 거기 일렬종대로 서 있는 산수유 그늘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2009. 3.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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