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주읍 경산리 성밖숲의 왕버들(천연기념물)과 공원 입구의 백년설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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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시험일에 아내와 함께 성주(星州)를 다녀왔다. 이날, 더는 감독관으로 나가지 않고 하루를 편하게 쉴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해째다. 다 쌓인 밥그릇 덕택이다. 갈수록 희미해지는 기억력이나 수업 치르기가 힘에 부치는 신체적 퇴행에도 불구하고 높아진 본봉이나 이처럼 잡다한 가욋일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는 건 나이 덕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보림 성밖숲
월항면의 한개마을을 거쳐 성주읍 경산리의 ‘성밖숲’을 찾았다. 읍의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이천 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이 마을 숲은 1999년 4월에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왕버들 쉰다섯 그루가 이 숲의 주인장이다.
사람들은 성주라고 하면 으레 ‘수박’과 ‘참외’를 떠올리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 낯선 숲이 떠오르곤 한다. 90년대 초반에 한 이태쯤 성주와 연을 맺었다. 해직 시절, 경산리의 외진 사무실에서 상근했는데, 일과가 끝나면 현직 조합원 교사들과 함께 거기서 회의를 하고 술을 마시곤 했다.
학교를 방문하는 길에 늘 스쳐가는 곳이었지만 그 시절에 성밖숲을 찾은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몇 해 전에 분회의 동료교사들과 함께 소풍을 와서 나는 비로소 성밖숲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짐작건대 성밖숲이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였을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이 숲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는 말이다.
성밖숲은 말 그대로 ‘성(城) 밖’에 있는 숲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성주읍성(邑城)인데, 토성이었다는 성의 흔적은 현재 북문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성밖숲은 조선시대에 읍성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림(裨補林)이자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조성된 수해방비림이다.
성밖숲의 왕버들 군락, 성주8경이 되다
비보림(裨補林)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세가 허한 곳에 나무를 심어 보완, 길복을 가꾸는 것을 말하는데 달리는 ‘보허림(補虛林)’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생기와 양기 등 복된 기운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비보림은 고려 때 성행했던 비보 사탑(寺塔)과 그 맥을 같이한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비보사탑이 성행했으나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락하면서 비보림이 비보 사탑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밖숲에 대한 기록은 성주의 옛 읍지인 <경산지(京山志)>와 <성산지(星山誌)> 등에 보인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기 성밖마을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이 빈번하였다.
한 지관(地官)이 “마을에 있는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재앙이 발생하니, 두 바위의 중간지점에 밤나무 숲을 조성하여야 한다.”고 하여 숲을 조성했더니 우환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하였다고 한다.
성밖숲은 수령 300년에서 500년에 이르는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이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가슴높이 둘레가 1.84~5.97m(평균 3.11m), 나무 높이는 6.3~16.7m(평균 12.7m)에 달한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견뎌냈는데도 늙은 왕버들 나무는 무성한 가지를 드리운 채 늠름하게 성 밖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성밖숲에 도착했을 때, 공원은 한낮의 정적에 빠져 있었다. 공원 어귀의 농구장에서 소년 하나가 열심히 슛을 쏘고 있었고, 벤치에는 노인 몇 분이 햇볕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성밖숲은 맞춤한 지역 주민들의 쉼터가 된 것이다.
비보의 의미 따위야 흥미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고 수해 방비의 뜻도 역사적 의미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여름엔 두꺼운 그늘을, 봄·가을에는 신록과 단풍의 경관을 마을에 선사하니 이 숲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성밖숲은 성주군이 선정한 ‘성주 팔경’ 중 제5경이다. [표 참조] 성주 팔경은 2009년 사진작가·대학교수·주민대표·군의원으로 구성된 ‘명승지선정심사위원회’에서 관내 대표 명승지 21곳의 후보지 중 현장 답사를 거쳐 대표성·상징성·경관·보존가치를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다.
백년설, 혹은 ‘몰역사적 추념’
일찍이 좋은 풍광으로 알려진 지역의 명승들을 모아서 ‘관동팔경’, ‘단양팔경’, ‘수원팔경’ 등으로 이름 짓는 전통은 꽤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 21세기의 팔경에는 풍광만을 다루지 않고 성주의 특산물 수박과 참외 농사를 짓는 지역의 비닐하우스 단지도 포함했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들어올 때 스쳐 지나갔던 도로변의 ‘백년설 노래비’를 우정 그냥 지나친다. 본명이 이창민인 가수 백년설(1914~1980)은 성주 출신으로 1938년 <유랑 극단>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해 1944년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지원 아래 ‘백년설 가요대’를 조직해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며 왕성한 친일 활동을 펼친 이다.
그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등을 불러 인기를 끌었지만, 친일가요도 적지 않게 남겼다. 1943년 ‘조선 지원병실시 기념’으로 만든 음반에 실린 ‘혈서지원’이 대표적인 친일가요다.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 나오는 ‘나라님’은 물론 일왕이다. [관련 글 : ‘혈서 지원’의 가수 백년설, ‘민족 가수’는 가당찮다]
혈서지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
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
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
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반도의 핏줄거리 빛나거라 한 핏줄
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 깊이 자란 몸
이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
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
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이 노래는 해방 후 한국전쟁 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로 바뀌어 계속 불리는 황당한 일이 이어졌으니, 역사에 대한 성찰에 무감각한 것을 어디다 비기랴. 일제 식민지 시기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오늘에 반복되면서 그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같은 역사적 퇴행이 공공연히 정부 주도로 이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의 끝은 어디쯤일까.
2015. 1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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