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학년도의 시작

그래도 봄이다. 어느 날부터 복도와 게시판에 하나둘 동아리 회원 모집 포스터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1년 365일, 책에다 코를 박고 사는 아이들인데도 학년 초에는 1학년 새내기를 회원으로 모셔오느라(?) 용을 쓴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동아리 소개 시간이 따로 있지만, 복도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아는 친구를 통해서 좋은 회원을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뜨겁기만 하다.
자세한 내용 없이 동아리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동아리는 어차피 동아리 소개 시간에 자세한 걸 다룰 터이니 새내기들에게 이름으로 어필해 보자는 전략을 선택한 듯하다. 좋은 후배를 모시기 위한 각 동아리의 광고 문안(카피)도 현란하다.
이웃의 남자 고등학교들과의 연합활동을 강조하면서 이성에 목말라하는 여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방학 중 답사 활동, 봉사 점수 등의 미끼를 던지기도 한다. 저마다 자기 동아리가 최고라는 과장 광고를 서슴지 않는데, 영상 제작 동아리는 자신을 ‘영상 제작 동아리계의 본좌’를 자임하는 것도 모자라 ‘8등신 조각 미남’과의 연합활동을 강조하고, 영상제에 5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인다며 뻥(?)을 치기도 한다.
심드렁한 3월, 아이들의 포스터를 구경하면서 비로소 새 학년도가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아직 꽃소식은 없지만 봄은 봄이다. 늘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자투리 시간을 내어 동아리를 꾸려가는 아이들은 보면 기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공부에 빼앗긴 시간을 확보하느라 아이들은 여름과 겨울 방학에 한 해의 활동을 발표회 형식을 빌려 마무리한다.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연극반은 올해 내가 지도하게 된 동아리다. 지도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맨 먼저 나를 지도교사로 초빙하려고 ‘찜’한 결과다. 지난해 아이들 모습을 보고 되잖은 충고를 했더니 그런 게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잔소리꾼을 얻은 거라고 을러두었는데 글쎄. 잔소리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기쁨도 함께 누리고 싶다.
맨 위의 장미꽃은 제자가 보내 준 것이다. 울적한 마음이 전해졌던가, 힘내라고 보내 준 꽃인데, 덕분에 동료들과 함께 호사를 누리고 있다. 여자 동료 하나는 자주 와서 향기를 맡아보곤 해서 나도 흉내를 내어 보았지만 별로 향이 강하진 않은 듯하다. 동료는 야생의 장미가 훨씬 강한 향기를 갖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렇다. 사람이나 꽃이나 바람과 햇살 속에서 스스로 자랄 때, 그 향이 그윽할 터이다.






2008. 3.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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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2018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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