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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 지원’의 가수 백년설, ‘민족 가수’는 가당찮다

by 낮달2018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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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비 셋과 흉상으로 기려지는 성주 출신 ‘친일 부역’가수 백년설

▲ 성주읍 성밖숲 공원 어귀에 1992년에 세운 백년설 노래비
▲ 성밖숲 공원은 수백 년 묵은 왕버들 59그루가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로 성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 공간이다.
▲ 음반 표지의 백년설

세 번째 ‘백년설 노래비’를 만난 건 독립운동가 장기석(1860~1911) 선생의 ‘해동청풍(海東淸風)’비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성주 읍내에서다. ‘나그네 설움’을 부른 대중가요 가수 백년설(1915~1980)이 성주 출신이라는 건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관련 기사 : 곡기 끊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와 ‘민족 가수’ 백년설)

 

성주 군민의 휴식 공간인 성밖숲 공원 들머리에 군민 모금과 성주군의 지원으로 첫 백년설 노래비가 세워진 건 1992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적지 않은 군국가요를 불러 일제에 부역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때라 노래비는 말썽 없이 세워졌다.

 

‘백년설 가요제’로 소환된 친일 가수

 

백년설은 2003년 성주군이 연 ‘백년설 가요제’로 다시 소환되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친일 전력을 문제 삼은 성주 농민회 등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었다. 결국 성주군은 이듬해부터 가요제 이름을 ‘성주 가요제’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진주에서 시민들의 반발로 ‘진주 가요제’로 바뀐 남인수 가요제와 비슷한 사례다.

 

시대적 분위기에 밀려서 ‘백년설’ 이름을 포기했지만, 가요제를 주최한 성주군은 물론, 그 이름을 살리는 데 동의하는 지역 인사들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6년 후인 2009년, 성주고 총동창회에서 모교 교정에 선배인 백년설의 동상과 노래비를 세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마침 그해 <친일인명사전> 발간(2009.11.)을 앞두고 친일 문제가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던 때라 이번에는 성주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반대운동을 벌였다. 한동안 충돌이 거듭되며 뉴스를 타던 문제는 어느 날부터 슬그머니 가라앉아 버렸고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 백년설의 흉상. 누군가가 훼손한 듯 페인트가 얼굴에 흘러내렸다.
▲ 백년설 노래비와 흉상은 성주고 본관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오른쪽 건물은 성주고 강당이다.

그해 10월, 지역민의 반대 투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년설 노래비와 그의 흉상은 성주고 교정에 성대한 제막 행사와 함께 공개되었다. 가요제를 연 성주군이야 군민들의 민원에 일찌감치 손을 들고 말았지만, 이를 추진한 이들이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었을 터였으니 농민회와 전교조 등 반대 따위야 간단히 넘길 수 있었던가. 

 

성주고 본관 옆 교정에 본관을 향해 조성된 백년설 노래비는 ‘나그네 설움’의 악보가 새겨진 조형물의 형식이다. 그 조형물 위에 백년설의 흉상이 성주고 본관 옆면을 바라보고 있다. 성주 사람이 아닌지라 백년설 흉상이 세워지고 난 뒤에 성주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공연히 ‘농민회나 전교조’ 같은 ‘빨갱이’ 단체들이 수선을 피웠다고, 백년설 같은 유명 인사로 지역을 홍보하면 좀 좋으냐고 하는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흉상 위에 일부러 부은 듯한 페인트가 그의 얼굴에 흘러내려 생긴 얼룩은 흉상 건립을 마냥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 노래비 앞에 세운 동상건립 추진위원회 빗돌. 백년설을 '민족가수'라고 일컫고 있다.

성주고 교정의 백년설 기념물의 백미는 노래비도 흉상도 아닌, 기념물 앞 오른쪽에 세운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빗돌이다. 이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의 이름 앞에 붙은 ‘민족 가수 백년설(이창민)’이란 수식어 때문이다. 함부로 아무 데나 붙이지 못하는 ‘민족’이란 꾸밈말이 백년설 이름 앞에 늠름하게 붙은 것이다.

 

‘국민’이란 말은 그나마 대중적이어서 ‘국민 배우’, ‘국민 여동생’ 따위로 쓰이기도 하지만, ‘민족’이란 관형어를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은 그 함의가 무겁고 큰 까닭이다. 민족이 쓰이는 사례도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같다. 일제에 저항한 시인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같은 분들을 일러 ‘민족시인’이라고 일컫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여 11곡의 군국가요를 불러 ‘천황의 병사’가 됨을 기꺼워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다짐한 대중가수에게 ‘민족’이란 꾸밈말을 붙인 것이다. 설마, 추진위원회가 활동할 때부터 그런 명칭을 썼을까, 차마 그것은 지나가는 말로도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주 출신 대중 가수 백년설, 일제 말 11곡의 군국가요를 불러

 

성주 이씨로 고려말 문신 이조년(1269~1343)의 후손이라는 백년설(白年雪, 1915~1980)의 본명은 이갑룡이고 해방 뒤에 이창민으로 정식으로 개명했다. 그는 성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성주농업보습학교(지금의 성주고)를 졸업했고 서울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다.

 

극작가를 꿈꾸었던 그는 일본에 가서 연극을 공부하려고 음반 회사에 드나들다가 1938년 태평레코드사 전속 가수들이 녹음하러 일본에 가는 길에 동행했다. 일본에서 시험 삼아 녹음한 대중가요 ‘유랑극단’이 히트하면서 본격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백년설이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 것은 이후 1939년 ‘두견화 사랑’·‘마도로스 수기’, 1940년 ‘어머님 사랑’·‘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 1941년 ‘만포선 길손’·‘복지만리’·‘대지의 항구’ 등을 발표하면서다. 그는 해방 이전에만 모두 70여 곡의 대중가요를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대중가수로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유행가를 불러주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식민 지배, 침략전쟁 따위를 선전·선동하고 이를 미화하는 군국가요를 모두 11곡이나 불렀다.

 

특히 일제 지원병 관련 노래들은 일왕의 은혜를 운운하며 나라에 목숨 바치겠다는 결의가 넘치고 어머니 은혜를 이르면서도 적탄 아래 죽어서 돌아가겠다는 등의 사연이 담긴 노골적인 친일가요다.

 

백년설을 ‘민족 가수’로 기린 추진위 관계자들도 백년설의 군국가요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보다 ‘나그네 설움’ 등의 유행가를 불러 대중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박정희를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부역 이력보다 근대화의 아버지로 길이 기리는 정서와 마찬가지로.

 

추진위에 이름을 올린 이 가운데는 경상북도 교육감을 지낸 이(도승회), 내무부·건설부 장관과 대구시장을 지낸 이(이상희)도 있다. 다른 데도 아닌 학교에 이 비를 세우면서 백년설에게 ‘민족 가수’라는 이름을 붙인 이들의 몰상식과 배짱이 놀랍다. 그게 ‘매국노’ 이완용을 ‘구국의 영웅’으로 기리는 것과 진배없다는 걸 이들만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민족 가수’ 운운은 ‘매국노’를 ‘구국의 영웅’으로 기리는 것

 

5년 후 2014년, 이들은 ‘백년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년설 가요제’ 살리려고 애썼다. 한 5년쯤 지났으니 이전의 갈등은 묻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2007년 백년설의 장남이 재경 성주문화원 특별회원 앞에서 한 사과도 동기가 됐다. 이들은 백년설 가요제를 되살리면 매년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이 가능해 ‘성주 참외’ 홍보 효과는 물론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강변했다.

 

결국 결과를 뒤집을 만한 여론을 얻지 못해 사위었지만, 여전히 이들은 백년설을 ‘성주의 자랑’으로 복원하고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를 다시 열어서 지역경제를 살리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이 여론의 동의를 얻는 분위기에서 부득이 철수를 선택한 것일 뿐 그들은 백년설의 친일 부역 사실과는 별개로 그를 ‘성주의 영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백년설이 부른 군국가요의 가사들. '혈서 지원'은 일부, '아들의 혈서'는 전문이다.
▲ 형식은 지원제였으나 강제로 징집된 조선의 소년병들.

“일제강점기 말기에 백씨가 훼절 가요를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활동한 어느 가수보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다.”(백년설 노래 사랑 모임 회장), “‘생명 문화의 고장 성주’에서 백년설 선생의 영광을 재현하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백년설 가요제를 부활하려고 한다”(지방일간지 기자)라는 찬사가 이어지는 것은 명백한 방증이다.  그의 ‘훼절’은 그가 부른 ‘나그네 설움’ 따위의 유행가로 상쇄되고 그는 ‘탄생’과 ‘영광’ 따위의 어휘로 기려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할까.

 

2019년에는 대구의 유명 시인 이동순이 백년설 찬양에 동참했다. 민중을 상징하는 소재 ‘개밥풀’로 등단해 신동엽 창작기금까지 받은 바 있는 이 시인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가수 백년설’이라는 글에서 교묘한 언설로 백년설의 친일 부역을 눙치고 그를 “민족의 절창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 단 두 곡으로 한 시대를 감동적으로 풍미했던 가수”로 복권했다. [관련 기사]

 

‘탄생’, ‘민족의식’,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 이어지는 찬양의 언설들

 

그는 “가요작품이란 것은 항시 그 시대 대중들과 더불어 숨 쉬고,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가요작품을 체제의 선전을 위한 나팔수로 교묘히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식민지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이른바 군국가요란 것이 그러했”다고 썼다. “백년설도 그러한 경우”라면서 그에게 물을 책임을 ‘식민 지배자 일제’에 떠넘긴 것이다.

 

그는 퇴락한 백년설 생가에서 “비감한 심정에 젖어”들었는데, 그것이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처참한 얼굴이자 본모습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기어이 발끝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고 고백한다. 그가 말한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는 <친일인명사전> 등으로 이루어진 뒤늦은 친일 부역의 역사 청산을 말하는 것일까.

 

백년설이 군국가요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부역하던 1941년 이후의 조선은 조선 민중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허덕이고 있었다. 중일전쟁(1937) 이후 일제는 지원병의 형식으로 조선 청년을 전쟁에 끌어들인 이래,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를 강행하여 학생들마저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그가 노래한 ‘혈서’ 시리즈 대중가요는 일제의 징병제를 미화·찬양하고 천황의 병사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어머니에게 죽어서 돌아가겠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은 군국가요였다. 시인이 말한 상처와 유린은 백년설이 아니라, 그 시절에 끌려가고 죽어간 조선 청년들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 성주 읍내 성주 이씨 유허에 세워진 백년설 노래비. '번지 없는 주막'이 새겨져 있다.

세 번째 세워진 백년설 노래비는 성주 이씨 유허에 있다. 여기에도 그가 족친이라는 혈연 외에 그의 친일 부역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듯하다. 같은 성주 이씨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분인 이종일 선생을 알리는 비석보다 훨씬 크고 당당하게 백년설 노래비가 서 있는 이유다.

 

지역 출신 인사의 긍정적 명성에만 기대는 형식의 고장 자랑은 우선은 빛나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명성 뒤에 음습하게 도사린 흑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지역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오도할 뿐 아니라 지역 정체성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영광이 그의 것이라면 오욕도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주고 노래비 앞에 세운 추진위 빗돌에 새긴 ‘민족’부터 지우는 것이 시급한 이유다. 성주는 백년설과 그를 기리는 이들만 아니라, 4만여 주민들의 삶터이고, 고향이기 때문이다. 친일 부역 가수의 이름을 빌린 백년설 가요제보다 그들의 삶과 이어진 ‘성주 참외 가요제’가 더 소중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2022. 2.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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