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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일기 쓰기

by 낮달2018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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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두어 해 남짓 아주 열심히 일기를 쓴 기억이 있다. 빼먹지 않고 날마다 쓰는 것에 얽매이느라 정작 속마음은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여 있는 일상이어서 주로 도서관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중언부언했다. 그때 읽은 책들이라고 해야 사건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줄여 놓은 서양 고전 다이제스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잠깐 일기를 들쑥날쑥 쓰기도 했지만 이후 일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았다. 일기 따위를 챙기지 못하는 것은 거의 성격의 문제인 듯하다. 꼼꼼하게 자기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자기 삶을 제어하는 출발점인 까닭이다.

 

나는 무언가를 메모하거나 기록하는 데는 젬병인 사람이다. 해마다 연초에 들어오는 수첩(이른바 ‘다이어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 학년의 교무수첩도 3, 4월에 조금 쓰는 게 고작이다. 항상 수첩을 끼고 다니고 기록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경이롭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경우에도 다이어리를 구하는 일은 없다. 어쩌다 들어오는 수첩도 남에게 주어 버린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쓰게 되면서 받은 취재 수첩도 더러 주머니에 넣고 다니긴 하지만 그게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한 번도 그렇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기록이나 메모에 둔감한 것은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하고 있어서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한때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장면 장면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재현하는 형식으로 그것을 주변에 들려주어 ‘보는 것보다 네 얘기 듣는 게 더 재미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니까

 

                                              ▲ 놀고 있는 수첩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요즘은 며칠 전에 들은 중요한 얘기를 남에게 전하다가 늘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에 좌절하기 일쑤다. 얘기를 풀면서 비로소 사건의 주요한 줄기와 줄기를 잇는 핵심 고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가까이 지내는 친구 때문이다. 이 친구는 일기라기보다는 ‘메모’의 형식으로 하루를 기록한다고 한다. 그는 한 포털사이트의 블로그에 비공개 폴더를 만들어 두고 거기다 하루의 주요 사건들을 적는다고 한다. 누구를 만났거나 어디를 갔거나 하는 등 신변의 변화를 갈무리해 두는 것.

 

글쎄, 내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을 기록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훗날에 굳이 내 삶을 돌이킬 일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 쇠락해 가는 기억력과 일상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의 꼬리나마 붙잡고 있는 것은 내 삶의 확인일 수는 있겠다.

 

친구 따라 나도 오래전부터 계정을 갖고 있던 엠파스에 비공개 폴더 하나만 있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블로그 이름은 ‘항해일기’고 비공개 폴더도 같은 이름이다. 내 아이디가 ‘돛과닻’이니 ‘항해일기’는 마침맞은 이름이 아닌가. 열흘 단위로 1개의 파일을 만드는 형식으로 일기를 써 내려간다.

 

그리고 한 달. 아직도 습관이 되지 않아서 일기 쓰기를 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튿날에는 어김없이 그날을 기록한다. 이걸 어디다 쓸까 싶었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기억을 되짚어 봐야 할 일이 생기면 컴퓨터를 켜고 일기를 뒤지면 뜻한 바는 이룰 수 있으니, 생광스러운 부분이다.

 

메모나 기록이니 하루치 일기라고 해도 불과 서너 줄에 그치는 경우도 숱하다. 가능하면 복잡한 마음의 행로 따위를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그게 또 하나의 부담이 될 듯해서다. 굳이 필요하면 한 줄로 그런 심사를 요약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내용은 건조해지는 대신 공연히 심각해지거나 센티해지는 감정은 제어가 되는 장점이 있다.

 

그림은 일기를 쓰는 엠파스의 블로그를 캡처한 것이다. 배경은 아마 이철수의 판화 같다. 마침 저런 배경(스킨)이 제공되고 있어서 반갑게 썼다. 블로그 이미지는 오블과 마찬가지로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아이 사진을 썼다. 이게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하루 일상을 거칠게 기록할 수 있는 내 일기장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저 일기를 쓰게 될까를 생각해 본다. 석 달, 아니면 반년, 조금 마음을 다스리면 일 년쯤은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한 삼 년쯤 지나면 그게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까. 무심히 햇수를 헤아리다가 나는 갑자기 이 시간의 압도적 중력에 숨이 막혀 온다. 살아간다는 건 여전히 어렵고 벅찬 일이다.

 

 

2008. 2.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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