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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호랑이’처럼 씩씩하지는 않더라도 ‘건강’하게

by 낮달2018 2022.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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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호랑이해를 새로 맞으며

▲ 24년 전인 1998년 무인년에 받은 친구 박용진의 판화 연하장.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19 상황이 다시 심각해진 상황에서도 해돋이를 보러 동해로 몰리는 인파는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2021년과 2022년을 구분 짓는 물리적인 시간의 경계를 시간으로 가늠하면서 거기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만, 1월 1일에 뜨는 해가 전날의 태양과 다르지는 않다.

 

올해는 ‘검은 호랑이’의 해

 

언제부턴가 이 한 해의 경계를 무심히 넘기고 있다. 몇몇 동료와 선후배, 제자들의 문자를 받으며 새해를 환기하지만, 별다른 소회는 없다. 멀리서 보내온 옛 동료의 문자는 손수 만든 그림 연하장처럼 보였다. 거기 그래픽으로 그린 호랑이를 보면서 ‘범 내려온다’라는 소리가 넘치는 이유를 짐작할 뿐이다.

▲ 멀리서 옛 동료가 보내온 그림 연하장

벽걸이든 탁상용이든 달력에 그해의 간지(干支)가 빠진 지는 꽤 오래된 듯하다. 지금도 농촌에 배포되는 농협 제작 달력은 일진(日辰)까지 새긴 게 더러 있으나, 해의 간지가 사라진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이 한글전용으로 굳어지는 과정의 변화다.

 

간지는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로 구성된다. ‘갑자’로 시작하여 ‘을축, 병인…’으로 이어지는 간지는 60년 만에 다시 갑자로 돌아가 ‘환갑(還甲)’ 또는 ‘회갑(回甲)’에 이른다. 우리 나이로 예순하나에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관련 글 : 갑을병정, 자축인묘, 간지는 과학이다]

 

올해는 임인(壬寅)년이니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인(寅)’의 해, 즉 호랑이해다. 지난 세밑부터 여기저기에서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라는 한 국악 그룹의 노래 한 대목이 들려오는 이유다. 조상들은 고양잇과의 포유류인 ‘호랑이’를 ‘범’이라고 부른 것이다.

 

일찍이 우리 민족은 산중호걸로 불려온 호랑이에게 인격을 부여하거나 신격화하여 숭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납고 용맹스러운 이 짐승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외경을 요사스러운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힘을 지닌 수호신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그래도 남은 두려움은 민화 속에서 바보스럽고 친근한 호랑이로 그려내기도 했다. 구전되는 문학에 등장하는 범도 마찬가지다.

 

산신, 산군(山君) 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었던 호랑이는 ‘민족의 수호신’으로 좌정했다. 호랑이는 마을 뒷산을 수호하는 산신이고, 시공간을 수호하는 십이지신 가운데 하나며,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사신(四神)의 하나로 백호(白虎)도 있다.

 

올 임인년은 호랑이해 중에서 ‘검은 호랑이의 해’라 이른다. 십간(十干)을 오행으로 나누어 나무(木 갑을), 불(火 병정), 흙(土 무기), 쇠(金 경신), 물(水 임계)로 정하고, 이를 각각 오방색으로 다시 나누면 임계에 해당하는 빛깔은 검정이 된다. 따라서 임인년은 검은(임) 호랑이(인)가 되는 것이다. [그림 참조]

▲ 12지 동물의 색깔은 천간을 오행으로 나누어 오방색과 이은 것이다.

갑오(甲午)년인 2014년이 ‘푸른 말의 해’가 되고, 경오(庚午)년인 1990년의 ‘백마’가 된 것은 이러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1990년생을 ‘백말띠’로 부르는 이유다. 경인(庚寅)년이었던 2010년은 ‘백호’의 해였다.

 

충북 청원군(현재 충북 청주시) 두루봉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호랑이 뼈는 최소 12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니 호랑이가 한반도에 서식하기 시작한 것은 10만 년도 전이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으로 형성된 한반도는 호랑이가 서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호랑이는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에도 등장했다.

 

이후 선사시대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사냥 대상의 하나로 호랑이가 새겨졌고, 고구려시대에는 5세기 무용총의 수렵도 등 고분벽화로 호랑이 그림이 그려졌다. 이 밖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는 서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백호가 그려졌다.

▲ 범(호랑이)는 산에서는 산신으로, 시공간을 수호하는 12지신으로 사신도에서 백호로 그려진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에 사신도 벽화를 그렸다. 조선 후기에는 사찰벽화로 호랑이 그림이 그려졌다. 이는 불법 수호 구실을 하는 호랑이나 나한이 거느린 호랑이 등 불교 관련 그림이 주를 이루지만, 민간의 세시풍속인 용호문배도의 호랑이그림도 적지 않다.

 

한민족과 호랑이

 

용호문배도란 정월 초하루에 원화소복(遠禍召福)의 의미로 대문 양쪽에 붙인 용과 호랑이그림을 말한다. 19세기 어려워진 사찰 경제를 살리고자 대중들이 선호하는 민화 이미지를 불화와 벽화에 대거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호랑이는 액막이여서 무서운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민화의 영향으로 까치호랑이(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그림)처럼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호랑이 벽화가 전하는 곳은 선암사·용문사·금탑사·용연사·범어사 등이고 특히 통도사에는 응진전, 명부전 등 여러 곳에 호랑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한민족과 함께한 호랑이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해수 구제(害獸驅除)정책이 호랑이 절멸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이미 500년간에 걸친 조선시대 포호(捕虎) 정책도 한반도 호랑이 개체군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로써 한양도성에 출몰하던 호랑이가 사라지면서 ‘호환(虎患)’의 공포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민화 등의 그림과 설화 가운데 호랑이가 숱하게 등장하면서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릴 정도였던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씨가 말라 버렸다. 현재 우리가 동물원 등에서 볼 수 있는 한국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들여온 것이다.

 

한반도 안에 명맥은 끊어졌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한민족에겐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특히 한반도 형상을 닭 또는 토끼로 비유했던 일제에 맞서 20세기 초부터 우리 영토를 호랑이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가 각각 ‘호돌이’와 ‘수호랑’이었다.

 

호랑이는 지명과 설화 속에도 살아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호랑이가 포함된 지명은 전국에 무려 389개나 된다. 새해 해돋이로 유명한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의 ‘호미(虎尾)곶’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경상북도에는 경주시 강동면에 호명리가, 예천군 호명면에 각각 ‘호명(虎鳴, 범울이)’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호랑이가 마을과 이웃해 있었다는 증거다.

▲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지난해 간행한 "한국민속상징사전 : 호랑이편" ⓒ 국립민속박물관

지난해 11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사업의 하나로 발간한 <한국민속상징사전: 호랑이 편>은 우리 문화 속에 다채롭게 깃든 호랑이 상징에 대한 해설서다. 이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호랑이의 다양한 모습과 그 문화적 의미를 정리한 호랑이 사전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민속상징사전: 호랑이 편>

 

사전에는 고대 ‘단군신화’로부터 평창 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에 이르기까지 호랑이 관련 내용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염병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로 표기해 왔는데 이는 그 고통을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라 한다. 

 

사전 내용은 웹사전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정부의 공공정보개방 정책에 따라 공공데이터포털(www.data.go.kr)에서도 사전 콘텐츠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호랑이의 해’라고 해서 올해가 더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상징에 맡겨 올해를 씩씩하게 살아가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글쎄, 용감하게 해야 할 일이 내게 남아 있지는 않은 듯하니, 그냥 별일 없이,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무엇보다도 이태째 몸을 괴롭히고 있는 알레르기라도 물러갔으면 좋겠다.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사실은 가끔 두렵다) 살아서는 건강하고 싶다는 바람은, 인간에게 지나친 욕심일까, 아닐까. 그게 욕심이라면 대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거기 달아 두고 싶다.

 

 

20122. 1.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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