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干支), ‘미신’ 아닌 ‘과학적 전통’ 이다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아침에 한 뭉치의 <한겨레> 새해 특집호가 배달되었고, 텔레비전 채널마다 새해를 기리는 프로그램이 바쁘다. 무싯날처럼 심상하게 제야를 지냈고, 역시 여느 날처럼 새해 아침을 맞은 나는 아내와 잠깐 덕담을 나누는 거로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2010년은 범의 해, 경인(庚寅)년이다. 해를 간지(干支)로 표기해 온 우리의 전통은 꽤 역사가 깊다. 간지는 ‘동양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우주 만물이 주역의 이치에 따라 순행함을 나타낸다.’ 일찍이 중국에서 들어온 간지는 한국 민족문화와 민간신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태양력의 도입과 함께 급격하게 쇠퇴했다.
‘간지’는 미신 아닌, ‘과학적 전통’이다
한때 사람들은 자기 출생연도의 간지를 알고 이를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며 살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단지 간지에서 비롯된 자기 ‘띠’를 알고 있을 뿐이다. 간지는 요즘 해가 바뀔 때 반짝, 그리고 기껏해야 토정비결을 보거나 사주를 볼 때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간지는 예전에는 달력에도 필수적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간지가 적힌 달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해의 간지가 생각나지 않아 달력을 뒤적여 보던 일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일상에서 쉬 접하지 못한 풍습 따위는 금방 잊히기 마련인 것이다.
간지는 말 그대로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배합하여 만든 60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라고도 한다. 이 10간과 12지가 1년에 하나씩 묶여 간지를 이루기 때문에 원래의 간지로 돌아오려면 60년이 걸린다. 사람이 만 60세가 되는 ‘회갑(回甲)’, ‘환갑(還甲)’을 기리는 것은 ‘갑자가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간지가 결혼·안장(安葬)·이사 등의 ‘택일’부터 ‘운세’까지 민간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박성래 교수는 간지가 ‘인류가 만들어 낸 어떤 계수법보다 간편하며 사람들의 계산과 기억을 돕는 데 편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고쳐 써야 할 과학용어’란 글에서다.
알다시피 박성래 교수(한국외국어대 명예)는 우리나라의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다. 그는 ‘낡고 미신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간지가 실은 ‘애당초 미신적인 요소라고는 조금도 없’는 ‘10진법과 12진법이 결합한 60진법을 교묘하고도 편리하게 사용하던 과학적 전통’이라고 일러준다.
간지는 연도뿐 아니라 달[월(月)]과 날[일(日)]에도 부여된다. 연도의 간지를 세차(歲次)라고 하고, 월의 간지를 월건(月建), 일의 간지를 일진(日辰)이라고 한다. 시(時)에도 간지를 붙인다.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사주(四柱)’라 하는데 이는 사람을 집으로 비유하고 생년·생월·생일·생시를 그 집의 네 기둥이라고 보아 붙이는 이름이다.
꺾어지는 해, 2010 경인년
사주는 각각 간지 두 글자씩 모두 여덟 자로 나타내므로 ‘팔자(八字)’라고도 한다. 우리가 ‘팔자 고치다’, ‘팔자가 세다’고 할 때의 그 팔자다. 역술에서는 이 사주팔자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므로 여자가 개가하거나, 가난하던 사람이 잘살게 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가리켜 ‘팔자를 고치다’고 하는 것이다.
2010년은 끝이 ‘0’이므로 당연히 ‘경’자로 시작하는 간지를 갖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으로부터 60년, 같은 경인년이다.
올해는 경술국치(1910)로부터 100년이고, 광주민중항쟁(1980)으로부터는 30년이 되는 만만치 않은 해다. 이른바 ‘꺾어지는 해’라고 하는데, 이 꺾어짐의 의미가 온 나라 사람 모두의 기쁨과 희망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우린 어릴 적부터 ‘원숭이’가 아니라 ‘잔나비’라 불렀고 ‘호랑이’ 대신 ‘범’이라고 써서 ‘호랑이띠’보다는 ‘범띠’가 더 익숙하다. 지금은 멸종하고 없지만 깊은 골짜기에는 호랑이가 서식했다. 그래서 ‘범’이 들어간 동네나 지명이 꽤 된다. ‘범울이[호명(虎鳴)]’도 많고 ‘범앞골’이니 ‘범바우’니 하는 이름이 그것이다.
우리 민속에서 범은 위험한 짐승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영물’, 의리를 아는 친숙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호랑이는 신화에는 물론, ‘호랑이와 곶감’과 같이 민담 속에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조선 시대 민화에도 단골로 형상화된 소재였다.
호랑이는 ‘우백호(右白虎)’라 하여 사방신(四方神) 가운데 서쪽 방위를 담당한다. 또 산신령의 수호자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민간에서는 산신 그 자체로서도 이해되기도 한다.
호랑이는 ‘용맹’의 상징이고 ‘사(邪)’를 물리치는 신령함을 가진 영특한 짐승이다. 특히 민화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벽사(辟邪)’와 ‘길상(吉祥)’의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
새해 예산안이 날치기 처리되면서 밝은 2010년, 해외파병과 4대강에 울려 퍼질 ‘삽질’ 소리, SSM의 확대, 서민복지의 축소, 물가인상, 더욱 기승을 부릴 사교육, 도시 재개발의 문제, 물꼬는커녕 있는 통로마저 막히고 있는 남북관계 등 온갖 악재 앞에서도 사람들은 새로 ‘희망’을 생각한다.
‘호랑이’와 함께 ‘역사의 진전’을
새해인 것이다. 그게 한갓진 기대에 그치리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억대 연봉’은 아니더라도 새해의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호랑이가 뜻한다는 ‘벽사’와 ‘길상’의 의미는 더욱 애잔하게 우리의 가슴에 다가온다.
식전에 벗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속절없는 한 해 보내고 또 새날이네. 달라질 건 없지만 참고 사세.” 그렇다. 달라질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지 못하듯,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진전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오랜 싸움은 시방 우리가 서 있는 길 위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 말이다.
2010. 1.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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