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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청정 숲길로 드는 옛 가람, 고운사(孤雲寺)

by 낮달2018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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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숲 속의 도량, 경북 의성의 등운산 고운사

▲ 나한전에서 내려다본 고운사 경내. 종각과 가운루 한쪽이 보인다.

고운사(孤雲寺)에 들른 건 지난 8월 중순께다. 의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략 백오십여 장의 사진을 찍었고, 짬이 나는 대로 사진을 훑어보면서 방문길의 감흥을 되새기곤 했다. 비록 생물은 아니지만, 사진도 오래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참나무통에 든 포도주처럼 숙성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관련 글 :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의 가을 본색]

 

고운사, ‘시대와 불화한 고독한 천재’ 최치원과의 연

 

고운사 방문은 두 번째다. 9년 전쯤 가족들과 스치듯 들렀는데, 절간 한쪽을 흐르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의성에서 근무할 때, 날마다 고운사 입구를 표시한 이정표를 쳐다보며 다녔지만, 정작 이 절집의 이름이 왜 ‘고운(孤雲)’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의상이 창건한 이 절은 원래 ‘높을 고(高)자’ 고운사였다. 그 이름자가 ‘외로울 고(孤)자’로 바뀐 것은 신라말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857~?)과의 인연 때문이다. 고운은 이른바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육두품 신분으로 태어나 그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40여 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온 나라를 유랑하다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던 “시대와 불화한 고독한 천재”(정출헌 교수) 시인이다.

▲ 고운사의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의 입구로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이다. 아름답고 한국적인 일주문으로 꼽힌다.

그가 즐겨 찾았던 곳은 경주의 남산, 합천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등이었는데, 강주(剛州)로 불리었던 의성에도 그의 발길이 미쳤던 모양이다.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승려들과 교유했던 고운은 고운사에서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스님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후 고운사는 그의 호를 빌려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

 

도선국사가 중창, 지장보살의 영험 성지

 

고운사가 중창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 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에 의해서다. 당시 이 가람은 다섯 동의 법당과 10동의 요사채를 둔 거찰이었다고 한다. 특히 예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는 얘기가 전하는 이 가람은 ‘석가의 부탁으로, 석가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부처 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육도(六道)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인 지장(地藏)보살의 영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 기지로 식량을 비축해두고 부상병 뒷바라지를 했던 사찰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숙종 이후 사세가 커졌고, 구한말에는 고종 황제의 강녕을 비는 연수전(延壽殿)을 건립하는 등 사격(寺格)이 높아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불교 31 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의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절측에서는 교구 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떨어진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지만, 대형화, 대량화를 지상의 목표로 여기는 게 종교의 본령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규모의 고찰과 달리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은 고운사가 자랑해도 괜찮은 장점이다. 고운사의 말사인 안동의 천등산 봉정사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래 어느 날부터 그야말로 '생뚱맞게'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데 비하면 이 장점은 두고두고 여운이 남는 대목이다.

 

이름난 절집들이 모두 아름다운 산자락에 깃들이고 산문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을 자랑하는데 고운사도 예외는 아니다. 주차장 앞에서부터 일주문인 조계문에 이르는 1킬로미터쯤의 솔숲길은 주변의 해묵은 소나무숲도 그윽하고, 잘 다져진 정갈한 황톳길이 정겹고 아름다웠다. 이 산사 주변의 숲은 대부분 붉은 소나무, 흔히 금강소나무로 불리는 적송이다.

▲ 고운사 주차장에 내리면 방문객을 맞이하는 소나무 숲. 고운사 경내는 물론, 주변의 솔숲을 구성하는 소나무는 모두 이 같은 적송이다.
▲ 주차장에서부터 일주문에 이르는 솔숲길. 길이는 약 1Km. 정갈한 황톳길이다.
▲ 고운사의 솔숲. 인적 드문 황톳길 좌우에 펼쳐진 이 숲은 일주문에 이를 때까지 대중들이 업처럼 지닌 세간의 잡념을 걷어가 준다.
▲ 고운사 경내는 대웅전 앞뜰을 빼면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지만,;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모두 산과 숲을 등지고 있는 덕분이다.
▲ 가운루(駕雲樓). 경북 유형문화재 151호. 최치원이 지었다는 누각이다 . 계곡에 세운 나무 기둥은 계곡 바닥의 높낮이에 따라 제각각이다.

가운루는 경내를 흘러내리는 계곡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 기둥을 세워 지은 누각이다. 기둥은 계곡 바닥의 높낮이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 누각은 길이가 16.2m, 최고 높이가 13m인 큰 누각인데, 세 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이를 떠받치고 있다.

 

높이가 다른 기둥으로 떠받친 누각 가운루가 연출하는 조화는 ‘상생’

 

가운루 아래 기둥 사이에 디딜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원래부터 있었던 건지, 나중에 갖다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번창했던 시절에는 삼백예순여섯 간의 건물에 이백여 대중이 기거했다는 거찰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이 누각을 구성하는 적당히 굽고 뒤틀린 거친 목제 부재들과 누각을 떠받치는 높이가 다른 기둥들이 연출하는 조화의 콘셉트는 ‘상생(相生)’이다. 계곡과 산, 숲과 바위는 저마다의 타고난 살결대로 골짜기에 들어선 인공의 구조물들과 어울려 있다. 자연을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이 땅 사람의 슬기가 거기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 가운루 밑을 지나는 고운사 계곡. 나무와 풀꽃으로 어우러진 이 내도 정겹다.
▲ 대웅보전. 새로 지은 불사의 흔적이 분명하지만, 뒷산에 빼곡히 들어찬 아담한 소나무 숲에 힘입어 경내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지는 않다.
▲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삼층석탑. 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
▲ 임금의 강녕을 비는 전각인 연수전. 경북 문화재자료 444호. 앞의 솟을대문이 만세문(萬歲門)인데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다.

종무소 위쪽에 여느 전각과는 다른 독특한 건물 한 채가 있다. 솟을대문(절집에 솟을대문이라니!)에 사방에 담을 쌓았고, 규모는 작지만 날아갈 듯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연수전(延壽殿)이다. 예의 솟을대문이 만세문(萬歲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다.

▶ 연수전 내부의 세살문. 단청은 낡았지만, 그 화려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최초에 영조가 내린,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고종이 새로이 지었다. 이름 그대로 임금의 강녕을 기원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형태와 벽화를 볼 수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단아한 매무새는 오래 눈길을 끈다.

▲ 무설전. 큰 방 한 개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원래 경론을 강설하는 곳이나, 지금은 수련대회나 기도 시 방문객들의 숙소로 사용된다.

가운루 너머 계곡의 벼랑에 바투 지은 오래된 전각들은 별로 크지 않지만, 매우 검박해 보이는데, 그건 대체로 건물의 규모와 맞배지붕이 가진 단순성의 결과인 듯하다. 팔작지붕의 건물들이 연출하는, 규모와 무관한 단아한 완성미와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조실채와 선원에 고인 적요와 무욕

 

무설전(無說殿)은 그런 맞배지붕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전각이다. 말로써 경론을 강설하는 곳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 수단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임을 표현한 것. 해서로 쓰인 주련의 글귀가 침묵으로 전하는 것도 그런 뜻이다. “부처님은 묵묵히 앉아 본래 말씀이 없으셨고, 설산에서 고행했으나 그 자취를 남기지 않으셨네…….”

 

낮은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사문(沙門)에 머무는 장년의 유학자를 떠올려 보라. 뜻을 펴지 못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노래한 고운의 오언절구 ‘추야우중(秋夜雨中)’이 태어났을 법한 장소 같지 아니한가.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秋風惟苦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擧世少知音)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窓外三更雨 )
등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燈前萬里心)

▲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내려다보며 선 조실채와 선원. 큰 스님의 수행처. 오른쪽 위에 보이는 지붕은 원래 대웅전이었던 나한전의 처마다.

절집을 찾는 시간에 따라 그 도량이 주는 인상과 느낌은 다르기 마련이다. 고운사를 찾은 것은 오후 두 시, 뙤약볕이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삼층석탑을 굽어보고 있는 나한전 옆에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조실채와 선원 앞에 서면 웬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그것은 필경 암키와로 가지런히 쌓은 담장과 성글게 짠 사립 너머에 고인 적요와 무욕이 지어내는 시간의 잔잔한 떨림 같은 것일지 모른다.

 

 

2006. 9.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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