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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야자’ 없는 일주일, 아이들은 즐겁지만 않다

by 낮달2018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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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자습 없는 일주일

▲ 작년 우리 반 아이들. 이제 수능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아이들은 요즘 뭔가 허전한 모양이다. 야간자습을 쉰 지 벌써 나흘째다. 이는 순전히, 찬바람이 돌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신종 플루’ 덕분이다. 2학년에서 유독 환자가 속출하면서 마땅히 방법을 찾지 못한 학교는 지난주 금요일부터 당분간 야자를 쉬기로 한 것이다.

 

처음 앞반에서 시작된 ‘발열’은 중앙통로를 건너 우리 반까지 왔다. 우리 반은 현재 세 명이 확진, 1명이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들은 정규수업과 보충수업을 마치는 오후 6시면 하교한다. 저녁도 학교 급식소에서 먹고 7시부터 10시까지 진행하던 야간 자율학습 대신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귀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최소 일주일간 야자를 쉰다는 발표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 얼굴이 모처럼 활짝 피었다. 교실을 빠져나가면서도 아이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좀 요령부득의 표정이 되어간다. 다소 과장해 말하면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다.

 

‘반강제의 면학’에 길든 아이들

 

아이들은 갑자기 주어진 시간 앞에 좀 당황스러워 보인다. 수업을 마치고 초저녁에 집에 가는 일도 익숙하지 않고, 저녁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게 어쩐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느낌이 있는 모양이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져서인가,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도 전보다 늘었다.

 

하기야 지난해 3월 입학식을 치르고 이틀째인가 사흘째부터 시작한 야자다. 한 학기에 두 번 있는 정기 시험과 모의고사를 치를 때만 야자 없이 귀가할 뿐이니 아이들이 집에 가면서 집에 다녀오겠다고 인사한다는 건 우스개만은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는 야자는 겨울방학을 앞두고서야 간신히 끝나니 아이들에게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건 엄연한 ‘일상’인 것이다.

 

야자를 하지 않으니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면 요 꾀가 말짱한 아이들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처음 발표를 들었을 때와 같이 화끈한 반응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좋아요, 그저 그래요……. 아이들 대답은 정말 뜨뜻미지근하다. 우리 반에 백지 몇 장을 건네주었더니 아이들은 거기다 자기 생각을 드문드문 써 놓았다.

 

야자 없는 일주일, 이야기하기

 

-일찍 집에 가니까 너무 편하다.

아침에도 덜 피곤하고~~

 

-피곤하지도 않고

집에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수업 듣는 것도 힘겹지 않다.

하지만 집에 가면 비교적

공부를 덜 하게 된다.

일주일에 4번만 야자 했으면 좋겠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거 같다.

덜 피곤하다는 점에선 좋고,

야자를 할 때보다 풀어지는 것 같아서

그 점은 안 좋은 거 같다.

그치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건

자기 몫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거 같다.

그래도 매일보단 일주일에 몇 번 정도로 하면

몸도 덜 피곤하고 적당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가 안된다는 친구들도 있지만 지금은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거다.

나중에 적응되면 자기 스스로 시간 조절해서

공부를 더욱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좋아용 ~ ♡

 

-좋지만 아무래도 야자를 하는 게 더 편하다.

하다가 안 하니까 이상하고, 공부를 덜 한다.

야자를 하는 게 좋다.

 

-내 생각에 야자는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 것 같다.

야자를 할 때는 집에 가고 싶었는데

야자를 안 하니까 오히려 학교에 있고 싶어진다.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서

좋았지만 공부는 안 하는 것 같다.

 

‘편하고 좋다’에서 ‘하는 게 좋다’는 의견까지 여럿이지만,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는 것은 ‘편한 대신 공부를 덜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편함’을 마냥 즐길 수 없는 ‘불안’이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어쩐지 이 주어진 자유가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은 정답을 알고 있다. 그걸 ‘적응’의 문제로 바라보거나, ‘자기 스스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건 자기 몫’이라는 야무진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느닷없이 주어진 이 넘치는 시간 앞에서 자신을 새삼스레 돌아보고 있는 셈이다.

 

주어진 자유 앞에 불안해하는 아이들

 

그러나 아이들은 대체로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공부해야 한다는 당위는 인식하고 있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이 ‘반강제의 면학’에 길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놓인 아이들은 노는 걸 즐기기보다는 뭔지 모를 불안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 강제적 야자에 참여하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야자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분위기를 해치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벌은 ‘자습에서 제외하고 집에 보내는 것’이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 학습 효율 따위와는 상관없이 친구들과 함께 책상 앞을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안심한다. 아니, 안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점은 학부모도 마찬가진 것 같다.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를 떠나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학부모들은 안심한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 빈 교실. 그러나 별로 정돈되지 않았다. 몇 시간 후면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까닭이다.

그런 아이들은 연민 없이 바라볼 수 없다. 단지 매일 심야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비평준화 지역의 선발집단인 아이들은 자기통제를 잘하는 편이다.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다. 기를 쓰고 책에다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 모습에 마음이 아픈 것은.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까르르 넘어간다는 여고생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날마다 반복되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에 지쳐서 귀가하고, 쉬는 시간이면 약속이나 한 듯이 책상 위에 엎드려 쪽잠을 빠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의지로 하라고 충고했다. 야자에 자신을 욱여넣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그것을 자기 시간을 만들 것을 주문했지만, 정작 내 조언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나는 내 목소리를 좀 공허하게 들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서둘러 빠져나간 빈 교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수능시험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착잡해지는 것은 3학년만이 아니다. 2학년들도 서둘러 수험생이 되어 버린 듯한 초조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10월인 것이다. 이 피 끓는 젊음이 빠져나갈 터널은 여전히 깊고 멀기만 하다.

 

 

2009. 10.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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