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이가 준 쥘부채와 세월
어릴 적에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햇볕에 발갛게 익어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커다란 부채로 한참 동안 바람을 부쳐 주시곤 했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천천히. 그게 성이 차지 않아 어머니에게서 부채를 빼앗아 마구 까불 듯 부쳐 보지만 금세 팔이 아파서 그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싱긋 웃으시고 다시 가만가만 공기를 떠밀어내듯 설렁설렁 부채질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팔도 아프지 않으실까. 어째서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저리 부채질을 하실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오래도록 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거듭하는 얘기다. 올해는 더위를 유난히 견디지 못했다. 여자아이들은 온도에 매우 예민하다. 교사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견디고 있는데도 몇몇 아이들은 얇은 담요를 덮어쓰고 있다. 심하면 치마 아래에다 체육복 바지를 주섬주섬 꿰입기도 한다.
그러니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난 뒤에는 아이들 눈치를 살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간신히 손에 잡히는 대로 얇은 노트 등속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그 열기를 다스리곤 했다. 그러다 집에 굴러다니는 낡은 쥘부채 하나를 가져다 한 보름쯤 생광스레 썼다.
칠판에 판서하거나, 설명을 위해 양손이 필요한 경우를 빼면 한 시간 내내 나는 설렁설렁 부채질을 해댔다. 지치지도 않고 천천히…, 그리고 오래 느긋하게 지속된 부채질. 그제야 나는 까마득한 유년의 어느 오후, 어머니가 보여주신 한결같은 부채질의 비밀을 깨닫고 있었다.
그 부채질의 비밀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한결같은 힘의 배분에 숨어 있었다. 더 빨리, 더 세게 바람을 일으키는 것보다 계속하여 선선한 공기를 배급하는 것이 땀을 말리고 체온을 낮추는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어린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의 쥘부채는 기름을 먹이지 않은 한지여서 곧 해지기 시작하더니 그예 찢어졌고 어느 날에는 살 부분이 양쪽으로 쪼개져 버렸다. 나는 미련 없이 그 찢기고 망가진 쥘부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어떤 아이로부터 위의 쥘부채를 받았다.
누군지는 알 수 없다. 그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교무실 앞 게시판에다 쪽지가 든 쥘부채를 얌전히 올려두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필적이 낯설지 않았다. 누구일까. 아이는 노란 쪽지로 내게 사연을 전했다. “여름은 다 지났지만, 선생님께 부채가 필요할 것 같아 준비했다”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걸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아이는 썼다.
물론이다. 나는 아이의 맑고 따뜻한 마음이 차분한 한지 빛깔처럼 내게 살갑게 닿아 옴을 느꼈다. 잠깐 나는 소녀가 준 부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된 추억처럼. 플라스틱으로 만든 살에 붙은 기름먹인 한지에는 쇠귀 선생의 글귀가 낯설지만 정겨운 필적으로 씌어 있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1994년, 복직한 학교에서 내게 비슷한 부채를 건네준 소녀가 있었다. 그때 열여섯 살이었으니, 지금 그 애는 서른 살이 되었겠다. 과묵하고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아,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현주다. 그 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그때 처음처럼, 풋내기 교사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하던 30대의 청년은 이제 쉰 줄을 넘긴 초로의 교사가 되었다. 그 열몇 해의 시간을 넘어 또 한 소녀가 내게 부채를 건넨 것이다. 나는 쥘부채 하나로 이어지는 이 시간과 인연의 무심한 순환에 잠깐 전율했다.
그렇다. 어디서나 인연이란, 그리고 삶이란 이렇듯 소중하고 무거운 것이다.
2008. 9. 18. 낮달
▶ 쥘부채 [쥘ː뿌-]
「명사」
접었다 폈다 하게 된 부채. ≒접부채˙접선02(摺扇).
¶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쥘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였다./박 생원 행세할 작정 하고 차양 넓은 갓을 쓰고 소매 달린 큰 옷을 입고 한 손에 쥘부채를 들고 안장마를 타고….≪홍명희, 임꺽정≫
▶ 그예
「부사」
마지막에 가서는 기어이.
¶밤낮 돌아다니더니 그예 몸살이 나고 말았다./운암댁의 눈자위가 질척질척 젖는다 싶더니만 그예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윤흥길, 완장≫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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