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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메밀꽃의 발견

by 낮달2018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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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라보는 메밀꽃, ‘이미지’와 현실 사이

▲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메밀밭. 2005년 가을의 사진이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매우 선택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 기억 속에서 접시꽃은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나온 이후 어느 날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내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본래 접시꽃이 그렇듯 지천으로 피어 있었던 것인지, 시인의 시가 세상에 나온 이래, 집중적으로 접시꽃이 심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자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새로운 ‘접시꽃의 발견’의 책임은 마땅히 내 기억에 있는 것이다. 일상에는 존재하되,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사물도 새롭게 부여된 어떤 동기로 말미암아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관련 글 : 접시꽃, 기억과 선택 사이]

어느 해 봄은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이 유난히 자주 눈에 밟혔는데, 올해는 오르는 산과 숲마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했던 듯하다. 그 해 특별히 찔레꽃이 풍년이었던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올봄이 담쟁이의 생육에 특별히 더 좋았던 때였다는 객관적 증거도 없으니 모두 기억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유년 시절에 가장 흔한 꽃이 분꽃과 접시꽃이었다. 동네 어귀에서부터 돌담으로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에는 초여름부터 접시꽃과 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이래, 시인의 시를 만날 때까지 내게 접시꽃의 기억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다.

▲ 학교 뒤 언덕의 분꽃. 이 꽃은 내 어릴 적 가장 흔한 꽃이었다.

메밀꽃에 대한 기억도 비슷하다. 기억 속에 메밀꽃은 이효석의 단편을 읽으면서 ‘소금을 뿌린 듯’하다는 표현으로 애매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10여 년 전에 예천으로 통근하던 시절, 같은 차를 이용하던 같은 과의 젊은 여교사를 위하여, 일부러 차를 우회하여 풍천 인근의 메밀밭을 찾아간 게 고작이다. 그것도 밭이라기보다는 불과 서너 평의 자투리땅이었다. 말하자면 메밀밭은 흔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지난 9월의 첫 토요일에 봉평을 다녀왔다.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때여서 북적대는 행사장을 피해 그 가장자리를 빙 둘러보고 돌아온 짧은 여행이었지만, 봉평 어귀에 드문드문 펼쳐져 있던 메밀밭의 기억만 선명하다. 그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리고, 선후배들이 함께하는 카페에도 퍼다 날랐다. [관련 글 : 메밀꽃과 봉평, 그리고 이효석]

메밀밭 사진을 구경하고 난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다. 시골에서 낳고 자랐거나 농사일의 경험이 있는 축과 그렇지 않은 축, 또는 전공이 자연과학인가, 인문 사회 과학인가로 뚜렷이 나뉘는 듯하다. 풍경을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이미지로 파악하는 축은 대체로 후자이고, 그 풍경 속에서 삶과 현실을 읽어내는 쪽은 전자이다.

▲ 신전리의 메밀밭. 모두 2005년 가을에 찍은 것들이다.
▲ 신전리의 과수원. 사과가 탐스럽게 익었다. 2005년 가을.
▲ 고마리꽃. 흰색으로 피었다가 점점 붉은 기를 더해 붉은색으로 바뀌어 간다.

의성 안계들에서 자랐고, 물리를 가르치는 선배는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우리 지방에서는 메밀이 슬픈 작물입니다. 비가 안 와서 모내기를 못 하면 조를 심었는데 그 뒤에 비가 너무 와서 조가 죽으면 다시 메밀을 심었지요. 메밀꽃이 온 들에 하얗게 핀 어느 해, 어른들의 한숨을 들은 기억이 있네요.”

경남 합천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농사를 지으며 자랐던 수학을 가르치는 선배가 단 댓글은 다음과 같다.

“작물로서 메밀은 좀 우선순위가 떨어졌습니다. 모내기할 때쯤 가을 작물을 심습니다. 김장 채소는 입추 무렵이지만, 그 철을 넘긴 때에 메밀을 심었습니다. 외 수박 걷어낸 밭에도 심었습니다. ‘동막골’에 메밀밭에서 일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감자를 캐는 밭도 감자밭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얼마 전 영화를 보고 확인한 바로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남북의 병사들이 감자를 캐던 곳은 콩밭이었다. 아울러 두 주인공이 메밀밭에서 한 일이라곤 멧돼지고기를 포식한 바람에 얻은 ‘설사’뿐이었다. 메밀은 따로 손대지 않고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 한다.

이 합천 출신의 선배는 ‘낙엽을 태우면서’에 대한 극사실적 논평을 해 주었다.

“‘낙엽을 태우면서’를 배운 기억이 아련합니다. (중학교 땐가요?) 나의 삶에서 낙엽은 땔감이든지 아니면 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태우면 연기가 눈에 들어가 매워 눈물 흘려야 하는데,(커피란 말만 들었지 그 향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모르거나 느낌이 전혀 다른 뜬금없는 말을 해 쌓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웬일인지 그 ‘슬픈 작물’이 자주 눈에 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메밀 경작이 늘어난 것은 아닐 터이다. 이 가을에 나는 다시 ‘메밀꽃을 발견’한 것일까. 선배의 말처럼 메밀은 가뭄이나, 홍수 때문에 제대로 주곡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때, 짓는 ‘대파(代播) 작물’이다. [관련 글 : 그 메밀꽃은 ‘진짜 메밀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난주 들른 북후면 신전리의 학가산(鶴駕山) 중턱은 메밀꽃으로 하얗게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인근 사과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낙들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까 저어하여, 참나무가 많아서 ‘섶나무밭’[신전(薪田)]이란 이름이 붙은 동네에 왜 메밀을 저렇게 많이 심었는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메밀밭 두렁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관련 글 :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메밀밭]

2005. 9. 25. 낮달



어쩌다 보니 메밀꽃 시리즈가 계속되고 있다. 모두 2년 전에 찍은 사진이요, 그때 쓴 글인데, 별로 새삼스럽지는 않다. 메밀꽃 구경은 북후의 신전리를 한 바퀴 도는 걸로 대신해야 하는데, 아마 중순께는 얼추 그림이 그려질 듯하다. 가능하면 달빛 아래의 메밀꽃도 한번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글쎄다.

 

2007.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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