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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기억과 선택 사이

by 낮달2018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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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저장된 기억의 선택

▲ 구미샛강생태공원(2014.6.21.) 연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접시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언젠가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매우 선택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썼지만 이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매우 선택적이다.”로 써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 기억의 층위를 채우는 갖가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선택, 접시꽃

 

어느 해 봄은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이, 또 어느 해에는 숲마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했다, 고 느낀다. 그러나 그 해 특별히 찔레꽃이 풍년이었던 사실을 입증할 방법도, 그때가 담쟁이의 생육에 특별히 더 좋았던 시기였다는 객관적 증거도 없으니 그 느낌이란 결국 기억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 와 도종환 시인

일상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때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그것은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서 접시꽃은 도종환 시인의 시 ‘접시꽃 당신’이 나온 뒤 어느 날부터 존재하기를 시작했던 듯하다. 어느 날부터 발길이 닿는 곳마다 접시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접시꽃은 진정 도종환과 무관하게 주변에 그렇게 지천으로 피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인의 시가 세상에 나오면서 접시꽃이 집중적으로 접시꽃이 심어진 것일까. 시집 <접시꽃 당신>의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긴 했지만, 후자의 가능성은 좀 희박해 보이니 결국 ‘접시꽃의 발견’은 내 기억 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저께 출근길에 접시꽃을 만났다. 어느 집 앞 텃밭에 화들짝 피어난. 올해 들어 처음 만난 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기억도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내가 무심히 스쳐 간 것들 가운데 접시꽃이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무르익은 빨간 꽃잎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새 7월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가늠했다.

 

내 유년 시절에 가장 흔한 꽃이 분꽃과 접시꽃이었다. 동네 어귀에서부터 돌담으로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에는 초여름부터 접시꽃과 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외로움을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 무렵의 나는 꽤 외로웠던 것 같다. 주변에 동무들도 많지 않았고, 나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아랫집은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다. 대문으로 들어가는 돌담길도 예사롭지 않은 데다 날아갈 듯 축대 위에 세워진 그 저택은 내겐 어둡고 괴기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만아, 만아! 새벽이나 저물녘이면 사랑의 노인이 소리 높여 손녀를 부르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려왔다.

 

그 ‘만’이라는 처녀는 내가 그 마을을 떠나기 전에 죽었다. 목을 매었다든가, 양잿물을 마셨다든가, 처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음산한 저택에서 들려오던 곡소리며, 분주히 돌담 골목길을 드나들던 흰옷 입은 사람들, 그리고 길가에 가득 피어 있던 선홍빛 접시꽃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 산골 마을을 떠나 신작로 마을로 내려온 이래, 시인의 시를 만날 때까지 내게 접시꽃의 기억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다. 성년에 이르기까지 접시꽃에 대한 기억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변의 사물까지 아우르기에는 내 성장의 길목이 여유롭지 못한 탓이었을까.

 

접시꽃(Alcea rosea)은 아시아가 원산지이며 2m까지 자란다. 심장 모양인 잎은 크고 솜털이 났으며, 가장자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줄기 밑 부분에는 여러 장 겹쳐진 잎들이 땅 표면과 거의 닿게 방사상으로 나와 있다. 꽃은 7월에서 9월 초순 사이에 핀다. 접시꽃은 주로 울타리나 담을 따라서 심는다. 꽃은 둥글고 넓은 접시 모양이다. 꽃 색깔은 다양해서 흰색, 노란색, 분홍빛이 섞인 붉은색, 자주색 따위를 띤다. 여러 접시꽃 변종은 대부분 여러해살이식물로 심은 지 2년째 되는 해에 꽃이 핀다. 관상용으로 많이 심으며, 꽃·뿌리는 약용으로 쓴다.

    <위키백과>

 

흔하면 천하다. ‘지천(至賤)’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까닭이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이 꽃은 그러나 천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키도, 꽃도, 잎도 다 큼직큼직한 데다가 그 빛깔도 선명하다. 잘은 모르지만, 병해(病害)도 별로 없는 듯하다. 줄기에 꽃이 너무 많이 달리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둥글고 넓은 접시 모양’의 꽃이 어디 접시꽃뿐이랴. 그런데도 이 꽃에다 ‘접시’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집 가까이 울타리나 담을 따라 심는 꽃이어서일까. 빛깔도 여러 가지라지만 나는 노란색이나 자줏빛 접시꽃은 만나지 못했다. 분홍이 섞인 붉은 꽃보다는 진홍빛이나 흰빛의 접시꽃이 훨씬 우아해 보인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성격은 다소 달라도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함께 시집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이다. 1986년에 나온 이 시집을 읽은 것은 1989년에 해직되고 난 뒤니, 그보다 훨씬 뒤다. 해직 동료 가운데 도종환도 있었다.

 

도종환, ‘살도 떼어주고 가는 삶’

 

집회에서 가끔 만났던 도종환 시인은 생김새도 그렇고 맑은 사람이었다. 해직을 전후하여 교사 시인들이 쓴 현장 시들이 적잖이 있지만 나는 그가 투옥되었을 때 쓴 옥중시가 좋았다. ‘새벽이 가까워 올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라는 구절만이 떠오르는데 대구에서 열린 어떤 행사에서 그가 직접 그 시를 낭독했었다.

 

‘투쟁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나는 그가 즐겨 쓰는 경어체의 서술이 주는 울림이 남다르다고 느꼈다. 진솔한 자기 고백에 담긴 진정성이야말로 그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에 공명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자신의 그 강점을 뛰어넘는 게 그의 과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문학> 교과서에 실린 그의 다른 시, ‘담쟁이’나 ‘흔들리며 피는 꽃’에도 그의 그러한 경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내가 그의 시를 즐겨 읽는 것과 달리 내가 여전히 그의 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는 것은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이 덕분일까. 그저께 그의 시 ‘접시꽃 당신’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에 대한 내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직 시기에 그의 시를 무심히 읽고 만 것은 그의 시가 가진 감상적 울림 때문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시 ‘접시꽃 당신’에서 화자는 시한부의 삶을 사는 아내를 두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 특유의 산문적 형식에 담긴 고백 조의 표현은 담담하다. 놀라운 절제를 유지하며 시인이 노래하는 적극적 삶의 자세 앞에 독자들은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엔 사랑의 실천과 타인을 위한 연대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도종환의 시들이 ‘슬픔의 법도를 잃지 않는다’라고 평가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시들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의 삶의 무거움을 새로이 깨달으며, 자신의 애통함이 이러할진대 더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은 어떠할까 하는 구체적인 연대감과 목숨 있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한 각성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샛강생태공원에 다녀왔다. 연꽃을 보러 갔는데 연꽃은 ‘일러 피지 않았고’ 굼실거리는 연잎의 푸른 물결 이쪽으로 접시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꽃을 렌즈에 담고 돌아오는 길, 나는 내내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의 모습은 어떨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2014. 6.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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