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 장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독일어)
인터넷을 뒤적이다 지난 9월 초순에 김광규 시인이 제5회 ‘이미륵상’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이미륵(1899~1950),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작가를 떠올렸다. 나는 서가를 뒤적여 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끄집어냈다. 범우사에서 1979년에 출판한 세로쓰기 본이다.
얼추 30년이 되어가면서 책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초판 나온 지 6년 후에 나온 중판(重版)인데, 값은 약소하게 1200원이다. 번역은 전혜린. 그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1965년이니 이 책은 번역자 사후에 다시 출판된 책인 셈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일제의 침략과 신구문화의 교체가 시작되던 자신의 소년 시대부터 독일에 도착하기까지’의 삶을 회상한 것이다. 1946년 독일에서 초판이 발행되자 곧 매진되어 1950년에 재판되었으나 다시 품절되었다.
낯선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온 작가의 무엇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독일어 문체와 이국적인 소재’ 등으로 전후 독일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독일인보다 더 아름답게 쓴 독일어 문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 소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본명이 이의경인 이미륵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의전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겨 상해로 망명했다. 1920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유학, 1928년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 ‘중국 문학’과 ‘역사’를 강의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저술과 한국학 강의를 통해서 조국을 독일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러나 조국을 떠난 지 30년, 그는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뮌헨 근교 그래펠핑에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3월 20일이었다. 석 달 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모르고 눈을 감은 것은 다행이었을까. [관련 글 : 재독작가 이미륵, 뮌헨에서 타계하다]
언젠가 우편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 나는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서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 누님의 편지였다.
지난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가 독일에 도착하고 5개월이 지난 때였다. 짧은 문장의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조바심 같은 것이다. 고향으로부터 소식을 듣고자 청년 이미륵은 날마다 우편국을 들렀다. 그러나 그가 받은 첫 소식은 어머님의 부음이었던 것이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한국에서의 소년 시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사촌과 누이, 그리고 동무들과의 소년 시절의 즐거움과 함께 부모님의 이야기, 일제의 침략, 민족의 저항, 조국을 떠나 낯선 유럽으로의 여정 등이 유려한 문체로 그려져 있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판되었을 때, 독일 문단의 최대의 찬사를 그에게 바쳤다. 그 찬사는 초판의 매진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의 서평도 찬양 일변도였다.
이 책의 초 개인적인 문제는 동양과 구라파의 접촉에 있다. 그러나 독자적이고 내면적인 고상하고 고결한 문체 속에는 동서양의 접촉을 수행하려는 저자의 은밀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소설이다. 격렬한 점이 없이 조용히 흐르는 산문이다. 이 사랑스러운 책에 내포되어 있는 불변성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균일성은 위안을 준다. 비록 슬픔이 어떤 사람의 영혼에서도 없어질 수 없을지라도.
― Wihelen. House stein
이미륵 씨는 어머님을 추모함으로써 그의 소년 시대의 기록을 바쳤다. 초판은 1946년 파이퍼 출판사의 전후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이 제2판은 이 추억의 저자 이미륵 씨에게 바친다. 우리들이 만났던 가장 순수하고도 섬세한 사람이었던―. (…중략…)
<압록강은 흐른다> 신판에 있어서 우리들은 민족이나 인종차별 없이 인생의 최고의 정직과 선량이라는 것을 자신이 세계의 탁류 중에서 시범한 인간과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방인인 그가 우리들에게 외계와의 이해에 있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것을 더욱더 깊이 파고 또 깊이 실천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 Piper Verleg 후기
이미륵은 열렬한 반 나치스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처형된 뮌헨대 후버 총장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그를 기억하는 일화는 그가 매우 속 깊은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나치가 한참 득세하고 있던 시대에 그가 스웨덴에 여행 갔었다. 같은 기차간에 탄 어떤 독일 사람이 이미륵 씨를 붙들고 맹렬히 히틀러 찬양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다 듣고 앉았던 그는 얘기가 끝나자 물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누구입니까?”
그 말에 그 독일 사람은 그를 마치 무슨 진기한 동물을 바라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니, 지도자 히틀러를 모른단 말입니까? 그분의 위업은…….”
하고 또 약 반 시간 웅변을 한 후에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히틀러 이름도 모르다니!”
하고 물었다. 그는
“독일에서 왔습니다!”
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하여 그를 죽음과 같은 침묵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 전혜린 “이미륵 씨의 무덤을 찾아서”(목마른 계절) 중에서
전혜린의 글에 따르면 이미륵은 어떤 나치 축제일에도 나치의 깃발을 달지 않았고, 오레온 광장에 있는 나치 전몰용사 제단 앞을 지날 때도 의무였던 경례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 당시로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행동이었는데도. [관련 글 : 작가 전혜린, 서른한 살로 지다]
전혜린은 자신의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미륵의 지인들이 모두 그가 ‘조용한 사람’이었고 ‘독특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회고했다고 전한다. 또 그녀는 ‘이미륵이 살고 생각한 것’은 ‘유리알처럼 맑고 조화에 찬 고전의 세계’라고 말한다.
1919년 9월 일본 법원으로부터 궐석재판으로 2년 구형을 받았던 이의경은 1990년 12월 26일 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이미륵과 이의경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국내 유족과 연락이 되지 않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던 훈장증은 2007년에야 17년 만에 유족에게 전해졌다.
<이미륵상>은 이미륵을 기려 한독협회와 독한협회가 공동으로 제정한 상이다. 한독협회는 올해 수상자로 독문학자 김광규 시인을 선정하면서 “시인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명징한 시어와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탁월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의 문화와 시문학을 세계에 알렸을 뿐 아니라 독문학자로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독일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197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김광규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등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의 ‘일상 시’를 개척한 이로 손꼽힌다. 그의 독역 시집 <조개의 깊이(Die Tiefe der Muschel)>가 독일어권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시인과 독자 사이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고자 노력”해 오고 “단순성·명징성 등의 언어적 특징을 갖는 ‘쉬운 시’”로 평가되는 그의 시를 나도 무척 좋아한다. 시를 잘 읽지 않는 편인데도 내 서가엔 그의 시집이 두 권이나 꽂혀 있다.
낯선 먼 나라에서 조국과 거기에서의 삶을 주제로 한 소설을 영혼의 재현처럼 써냈던 잊힌 작가를 기억하는 시간에 김광규의 시 ‘묘비명’은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2008. 9.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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