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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책 읽기, 그 도로(徒勞)의 여정

by 낮달2018 2019.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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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압박, 그리고 결기를 버리고 나니 …

책 읽기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 지 몇 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내 안에 더는 어떤 열정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조직 활동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내 삶을 마치 말라 바스러진 나뭇잎 같은 것으로 느끼기도 했다.

 

그건 슬픔도 회한도 아니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오랜 절망적 성찰 끝에 스스로 깨친 자기응시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무렵에 쓴 어떤 편지에서 나는 그렇게 썼다.

 

……시나브로 나는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는 게 어렵지 않을 만큼만 노회해졌습니다. 자신의 행위나 사고를 아무 통증 없이(!) 여러 갈래로 찢고 자를 수 있으며, 그 시작과 끝을 희미한 미소로,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없이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독서에 대한 강박은 좋게 말하면 인식에 대한 지향이지만 달리 보자면 문화 기호적 향락과 소비를 추구하는 일종의 딜레탕티슴(dilettantisme, 호사주의)으로 폄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지향을 책 속의 이론과 질서에서 찾으려는 태도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제 '책 읽기의 강박'은 없다

 

어느 날부터 내게 책 읽기는 진부한 일상의 한 갈피가 되었다. 예전처럼 독기를 품고 마치 싸움하듯 몇 날 며칠을 골몰해서 책을 읽어대는 결기를 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얘기다. 꼭 읽어야 할 책, 반드시 읽고 싶은 책에 대한 경계도 희미해졌다. 손이 닿으면 읽고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일상의 물결에다 몸을 맡겨 버린 것이다.

 

 

화제가 된 책이나 저자에 관한 관심도 무뎌지고, 선택의 폭도 대단히 부드러워졌다. 예전 같으면 살 만한 책인가 아닌가가 그 주요한 잣대였다면 요즘은 읽을 만한가 아닌가에 더 기울어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긴 했는데, 묵히는 책도 여전하다.

 

재미없는 책은 별 갈등 없이 처박아 버린다. 물론 내가 말하는 재미는 단순한 흥미와는 다르다. 세로쓰기에다 국한문 혼용인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를 줄을 쳐 가며 읽었던 젊은 시절의 오기 따위는 진작 사위고 없다. 최근 몇 년간 사 놓고 읽지 못한 책 가운데서 미련이 남는 책은 라페의 <희망의 경계>. 그녀의 <굶주리는 세계>를 읽었을 때의 감명은 여전한데…….

 

소설을 읽으면서도 나는 온몸으로 엄습해 오는 게으름의 마수(?)를 느낀다. 제발 끝내주었으면 싶은데 결말은 한참이나 남았다. 허구가 반드시 흥미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치는 시간이다. 소설 읽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면 과장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런 허구가 심드렁해지기 시작한 것은 맞다.

 

좀 덜 골치 아픈 거로, 가볍게 읽기를 원하지만 그런 책을 돈을 주고 사는 걸 낭비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습관을 깨기는 쉽지 않다. 결국, 사는 책의 면면은 거기서 거기다. 요즘은 쉽게 쓴 책에 좀 더 기울어진다. 그게 그건데 굳이 난삽할 일은 없지 않은가 싶어서다.

 

다시 6권의 책을 더 사다 

 

7월 말께 6, 그리고 며칠 전에 다시 6권의 책을 나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서 샀다. 7월에 산 책 가운데 읽은 것은 최규석의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뿐이다. (지금 이 책의 서평을 끼적이는 중이다) 인권운동가 오창익이 쓴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은 띄엄띄엄 읽고는 한다.

 

하나로 이어진 얘기가 아닌 한국 사회 리포트니 그걸 두고두고 읽는 건 별문제가 아니다. <한국 고전 시가선>도 자료로 이용할 책이니 독파 여부가 중요한 책은 아닌 셈이다. 최인훈의 단편집 <총독의 소리>는 현재의 대일 관계를 패러디하고 싶어서 샀는데 뜻한 바는 미뤄두고 총독의 소리만 다시 읽다 말았다.

 

개인시집이 아니라, 시선집 격인 <포옹><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는 모두 문태준 시인이 뽑은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태준의 시집 대신 이 책들을 산 건 그가 뽑은 시들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해서였는데, 아직 이 책들은 한번 일별하는 데 그쳤고 제대로 펴 보지는 않았다. 내 독서의 형식이 늘 그런 식이다. 아마 연내에는 이 책들을 마저 읽을 수 있겠지!

 

얼마 전 산 책 가운데 가장 가볍기로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과 김진규의 <달을 먹다> 등의 소설인데 아직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작년인가, 공선옥의 소설집을 산 이후, 처음으로 산 소설이다. 더 이상의 허구에 관한 관심도 시들해졌는가, 요즘은 굳이 읽고 싶어지는 소설도 없다. <달을 먹다>를 산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서평을 읽다가 무언가 회가 동해서였겠지.

 

이이화 선생의 역사책 두 권(<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오백 년 왕국의 종말>)을 산 건 순전히 요즘 역사책, 그것도 선생의 책을 읽는 게 편안해서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한 책도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문학사를 가르치다 보면 비로소 역사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역사적 맥락이랄까, 그런 걸 좀 분명하게 확인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런 책의 영양가는 그런 데 있는 것이다.

 

조너선 코졸이 쓴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 역사>는 이번에 산 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책들이다.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는 교육자인 저자가 젊은 교사에게 교직이라는 직업의 즐거움과 어려움, 그리고 열정에 대한 보상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도 제대로 읽어낼지 어떨지 자신이 없다. 몇 해 전에 나온 촘스키의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도 내 서가에서 잠을 자고 있으니 말이다.

 

<살아 있는 미국 역사>는 하워드 진이 쉽고 친절하게 다시 쓴 미국사.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는 너무 비싼 데다가 그걸 죄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 나는 이 책을 선택했다. “역사를 바라볼 때 선택과 강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을 편들어야 한다면, 나는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싶다.”는 게 저자의 변이다. 글쎄, 그의 미국사는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문화기호적 향락과 소비의 일부…

 

<죽음의 밥상>은 어느 지인이 보내준 책이다. 광우병 정국과 함께 주목받은 책인데 역시 그 무거움으로 치자면 위의 책에 뒤지지 않는다. 먹을거리들이 불결하고 비윤리적이고, 종종 잔혹하고 위험한 생산 과정과 유통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걸 폭로하면서 그 생산·소비 시스템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글에서 늘어놓은 책을 죄다 읽으려면 얼마쯤의 시간이 걸릴까. 몇 쪽을 읽다가 접고, 다시 폈다고 접고……, 그러다가 어느 날엔 읽었던 부분의 내용조차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는 이 도로(徒勞)의 책 읽기……. 모르긴 몰라도, 이들을 올해 안에 독파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면 어떤가. 읽히면 읽고, 읽히지 않으면 서가 한쪽에 처박는 것도 넓은 뜻에서의 독서행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온라인 서점의 내 보관함에는 최규석의 만화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열녀 춘향 수절가> 등 도서출판 보리의 겨레문학선집 몇 권, 조선조 문인 김려의 유배 산문집 등이 내 구매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 담긴 <연세 한국어사전>도 구미를 돋우는데 살까 말까를 고민 중이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한가위 연휴도 막바지다.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별 내용 없는 책 이야기를 주절댄 것도 어쩌면 앞서 말한, 또 다른 문화 기호적 향락과 소비의 일부가 아닐는지. 아니 아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공연히 잔뜩 폼을 잡은 건 내 천박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게 아닐까 싶어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2008. 9.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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