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봄, 혹은 희망

by 낮달2018 2021. 3. 27.
728x90

낙동강변에 당도한 봄, 그리고 희망

▲ 안동댐 아래의 낙동강 강변. 강과 산이 모두 아련하다.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조금은 뜬금없을 수도 있겠다. 이미 봄은 소리 소문도 없이 와 있으니 말이다. 겨우내 썰렁했던 아파트 담장 위에, 드러난 살갗을 간질이며 매끄럽게 휘돌아 지나가는 바람의 속살에, 숙취로 어지러운 아침 식탁에, 골목에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 이미 봄은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들른 조각공원에서 찍어 온 강변 풍경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자면, 그 풍경 속을 스쳐 간 실바람, 미루나무 그늘에 쌓이던 햇볕의 온기까지 뚜렷하게 느껴진다. 넘치는 햇빛 때문에 아련한 푸른빛 기운과 함께 시나브로 다가오는 건너편 산, 잘디잘게 떨고 있는 비췻빛 물결 등이 어울려 연출하는 이 풍경은 이미 봄이 우리 가슴속까지 와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 강변의 개나리. 꽃샘추위 앞에서 조심스럽기만 하다.

사진을 자주 찍게 되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는 건 버릇이 되었다. 덕분에 아파트 담장 위에 가지런히 전지된 개나리가 보일 듯 말 듯 봉오리를 여는 걸 일찌감치 들여다보고 있었다. 딸애는 어이없다는 듯 반문한다. “벌써 피었다고요?”

 

그렇다. 늘 이렇게 봄은, 그 꽃소식은 너무나 시나브로 다가와 사람들 일상의 무감각을 비웃는다. 아파트 후문 좌우로 일직선으로 늘어선 담장에 군데군데 개나리가 피고 있었다.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그 개화는 쉬이 눈에 띄지 않는다. 흐드러지게 핀 군락이 보여주는 화사함과는 전혀 다른 오종종한 모습으로 개나리꽃은 상기도 쌀쌀한 바람 가운데서 조그만 꽃잎을 활짝 열고 있었다.

▲ 아파트 담장에 핀 개나리.

머잖아 저 개나리는 노란 꽃잎을 떨어뜨리면서 새롭게 푸른 새잎을 틔우리라. 거참, 봄나무들이 대개는 꽃을 먼저 피우고, 새로 잎을 틔운다는 사실을 나는 나이 마흔이 한참 넘어서야 겨우 깨우치게 되었다. 인간이 가진 슬기가, 혹은 나이 들면서 쌓아가는 지혜라는 게 기실 보잘것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가끔, 봄이면 피어나는 꽃, 그 자연의 순환 앞에 새삼 각별한 감정, 놀라움과 신비한 무엇을 느끼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삶의 햇수가 주는 일종의 겸허함일 터이다. 20대의 젊은이에게서 그런 느낌을 찾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봄은 더러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다가가겠지만 가끔 그것은 희망과 관련한 어떤 ‘풍문’ 같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새로 만난 이백아홉 명의 여고생들, 그리고 내가 맡게 된 스물네 명의 아이들은 그러나 옹골진 희망이다.

▲ 학교 뒷산의 매화 꽃.
▲ 조각공원의 진달래 .
▲ 낙동강 강변 공원에 핀 진달래.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열여덟 살 나이는 공으로 먹는 게 아니다. 더러 내숭도 떨긴 하지만, 새로 만난 담임이 저들에게 보내는 시선에 담긴 관심과 다소간 ‘오버’임이 분명한 애정 표현에 활짝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큰아기들과 함께 서투르게 만들어 가는 시간도 또 다른 희망일 수 있겠다.

▲ 조각공원의 쑥.

봄을 즐긴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상춘(賞春)이라 하였다. 봄이 산등성이마다 진홍색으로 불타오를 때쯤에는 산을 찾아도 좋겠지만, 다가오는 주말엔 의성 사곡의 산수유 마을을 들러 그 상춘의 시간을 만나려고 한다. 서울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느라고 한 주가 늦어졌다. 시간을 번 만큼 화전리(花田里)의 산수유, 그 노란 꽃은 더욱 깊고 그윽해져 있을 터이다.

 

 

2007. 3. 27.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