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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수학 교사’가 되겠다고? ‘의사’가 아니고?

by 낮달2018 2021.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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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선생님이 ‘꿈’이라는 재미동포 명문대 합격 3관왕

▲ 각 기사의 제목들

며칠 전 읽은 일간지 기사 두 개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하나는 외고의 대학입시를 다룬 <조선일보> 기사고 다른 하나는 <한겨레>가 보도한 <연합>의 기사다. 두 기사 사이의 거리는 나날이 벌어져가는 이 나라의 양극화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전국 외고 30개교를 분석한 결과다. 외고의 교육과정은 인문 사회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수험생 중 상당수가 자연계 과목을 선택하거나 일부 학교에서 자연과정 반을 편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는 모두 의대를 가기 위한 선택으로 안양외고에서만 올해 53명이 의대와 한의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외국어 영재나 외국어에 능숙한 인재를 양성한다’라는 외고 설립 목적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이 나라의 고등학교가 출세가 보장된 대학을 가기 위한 정거장 역할을 해 온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외고가 의대를 가기 위한 수능 실력을 키우는 학교’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은 씁쓸하기만 하다.

 

‘의대’로 쏠리는 ‘욕망’이야 어찌 외대뿐이겠는가. 오죽하면 이 나라의 대학은 ‘의대’와 ‘의대 아닌 대학’으로 나뉜다고 하겠는가. 명문대 합격이 예상되는 상위권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중위권 학생들도 내심 ‘의대’와 같은 미래를 보장해 주는 학교를 열심히 짝사랑하고 있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짝사랑’인 이유는 뻔하다. 모두 한숨을 지으며 욕망을 거둬들이는 것은 그 성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 ‘의대’로, 또는 ‘의대’로 상징되는 기득권 계급을 향한 욕망의 질주가 넘치는 까닭이다. 너나없이 엘리트 계급으로 진입하기 위한 욕망은 서슬 푸르지만, 불행히도 이 땅은 희망자 모두를 의사로 만들어야 할 만큼 크지 않다.

 

너나없이 ‘의사’가 되겠다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마치 기적처럼 ‘천문학’이나 ‘물리학’ 같은 기초학문을 공부하겠다는 아이들을 찾느라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주변에서 그런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이 나라 학생들의 선택지는 언제나 ‘의대’나 ‘법대’, 혹은 ‘약대’ 같은 데에만 쏠려 있는 것이다.

▲ 의사는 아이들이 꿈꾸는 최고의 직업 가운데 하나다. ⓒ MBC

미래가 보장된, 안락한 삶을 꿈꾸는 아이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건 만인의 꿈이고 만인의 희망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더 나은 안락한 삶을 꿈꾸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욕망은 조로(早老)해 있다. 외고를 꿈꾸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그 욕망은 청소년기의 모든 꿈을 제압하면서 가장 강력한 행동기제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의 ‘조로(早老)한 욕망’들

 

의대로 진학을 꿈꾸고 있는 외고 학생들과는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한 재미 동포 여고생이 있다. 이민 1.5세 이예담(18) 양. 코네티컷주 윈저의 유대계 사립 기숙학교 졸업반인 이양은 하버드·MIT·프린스턴 등 세 학교에 합격했는데 모두 4년 장학금을 제시받은 상태다. 그런데 이양은 “사회에 나가면 가난한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을 하고 싶다”라고 한다.

 

이 여학생이 수학 교사를 희망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괜히 한번 폼을 잡느라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후 수학 교사가 될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사례를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겐 이 대비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 소재의 국립대학에도 목을 매는 이 나라의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그녀가 합격한 대학은 가히 ‘꿈의 대학’이다. 그런 학교들에 턱 하니, 그것도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이 여학생의 장래 희망이 ‘생뚱맞게도’ 이 땅의 모든 학생이 진저릴 치는 ‘수학 교사’다. 2011년을 사는 대한민국의 수험생들에게는 이 학생의 선택은 일종의 ‘미스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이 천박한 자본주의 대한민국과 신자유주의의 종주국 미합중국의 차이점일 수 있다는 걸, 씁쓸하지만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너무 많은 돈을 물려주면 자식 망친다’며 거의 전 재산을 자선재단에 기부한 ‘워런 버핏의 나라’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갖가지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고도 ‘정직’을 부르대며 존경받는 기업인 행세를 하는 ‘재벌 나라’의 차이다.

 

이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위법만으로도 임용의 결격사유가 되는 나라와 부도덕한 위법과 탈법 서너 가지는 고위직으로 가는 필수 요건(?)이 되어 버린 나라의 차이다. 한쪽에서는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의 초과이익공유제가 어떤 체제의 제도인지 모르겠다고 비양대는 기업인의 차이이다.

 

그러나 하고많은 의사 가운데 고소득의 자리를 마다하고 보건의료 운동에 종사하거나 관련 병원에서 스스로 ‘낮은 삶’을 사는 이도 있다. 회사원 수준의 보수를 받으며 노동자들의 법정투쟁을 지원하는 눈 맑은 율사(律士)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실천적 삶이 세상과 역사를 조금씩 바꾸어 왔다. 그것은 이 조로의 욕망으로 늙어가고 있는 나라, ‘내 아이만은’이 모든 이기와 저열한 욕망의 방패막이 되는 나라의 부박한 희망이라 할 수 있을지. 종일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의 불안한 어깨 너머로 나는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그들의 미래를 쓸쓸히 훔쳐보고 있다.

 

 

2011. 4.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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