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도 싼’ 행위는 몰라도, ‘맞아도 싼 아이들’은 없다
“저는 체벌을 찬성한다. 저희 아이는 안 맞는데 그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소수의 아이 때문에 저희 아이같이 평범한 다수의 아이가 피해를 보고 있다. 그 다수 아이의 인권은 어떻게 할 거냐?”
‘학생 인권’에 대해 강연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에게 따져 물었다는 한 학부모의 발언이다. 지난 14일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서울본부 주최로 열린 ‘학생 인권 시민 연속 특강’에서다. 이 학부모는 ‘곽 교육감을 싫어한다’며 위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에 대한 곽 교육감의 답변은 좀 원론적이다. 곽 교육감은 “평범한 아이, 사고 안 치는 아이들이 다수고 그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라면서 “학생 인권을 소수 학생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기사 바로 가기]
‘선량한 다수’와 ‘선량하지 않은 소수’?
학부모의 항의인즉슨, ‘체벌 금지’가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체벌은 허용되어야 한다’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소수의 말썽꾼은 모름지기 다수를 위해 두들겨 패도 좋다’이다. 더 줄이면 ‘그런 놈들은 맞아도 싸다!’가 될까.
현장에서 이 학부모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겠지만 기실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이 주변에는 적지 않다. 물론 이들의 자녀는 ‘소수의 말썽꾼 때문에 수업을 방해받는 선량한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소수의 ‘나쁜 아이들’ 때문에 ‘착한 자기 자식’이 손해를 입는 걸 기꺼이 감수할 학부모는 없다. 그런 손해 앞에서라면 체벌을 통해서라도 분위기가 평정되는 게 좋다고 여기는 건 ‘인지상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이 문제를 선악이나 시비의 문제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 ‘체벌 허용’ 여부를 물어보면 ‘반대’와 ‘찬성’은 확연하게 갈린다. 이를 가치중립적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이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말썽꾼이든 아니든 체벌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반대’에, 경험이 없으면서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에 손해를 입고 있다고 느끼는 소수 모범생은 기꺼이 ‘찬성’ 편에 선다. 이들 찬성론자는 일종의 작은 기득권자다. 이들은 현재의 제도를 용인하고 그 제도가 권위적인 방식으로 존속할 때 자신의 이익이 지켜지고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커질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그래서 ‘질서’를 숭상하고 다소 위력적인 방식으로도 그게 지켜지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체벌과 그에 따르는 방식으로 그런 질서를 세워나가는 교사를 선호한다. 교사의 위력이 통하는 한 자신들의 이해는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체벌을 겪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모범생 가운데서도 억울한 체벌의 기억이 있는 아이들이 체벌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과는 대비된다. 이 아이들에게 ‘체벌’은 나와 무관하면서 내가 지켜야 할 가치나 이익을 지켜주는 수단으로 일종의 순기능을 가진 ‘선(善)’이다.
체벌은 ‘선’인가, ‘악’인가
이는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의 이해와 관련하여 체벌을 용인하고, 보수적 교육관에 기대는 것과 그 내용에서 판박이다. 따라서 이런 이해를 기준으로 한 아이들의 인식을 무턱대고 ‘옳지 않다’라고 비난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반대로 ‘체벌’을 겪으며 자란 아이들에게 체벌은 어떠한 때에도 용인될 수 없는 ‘악’이다. 그들은 지속적인 체벌을 통해서 자존감을 상실하고 물리적 강제에 굴복하거나 면종복배, 저항과 증오를 키워나간 아이들이다. 체벌은 이들에게 일시적 고통으로 기능했을 뿐, 근원적 행동과 인식의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체벌을 ‘폭력’이 아닌, 교육적 징벌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이러한 상반된 체벌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체벌은 반쪽의 진실일 뿐이다. 어느 일방에게는 긍정적 지도 방법이 왜 어느 일방에게는 용인할 수 없는 사적 징벌에 불과한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 ‘체벌’은, 그 교육적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 ‘체벌’의 효용을 주장한 예의 주장은 ‘인지상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럴싸한 명분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체벌에 기대어 자신의 이해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논거는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인권’은 ‘공동선’이다
소수의 방해자를 체벌로 제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그것으로 보호받는 자신들의 이익이란 단기적이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이들은 자신의 이익에 급급하여 소수자들의 ‘인권’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단기적 이해를 좇느라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외면한 것이다.
인권이란 그 보편적 정당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적 이해’를 넘어 공동선을 지향하며 그것을 통해 성취되는 이익은 훨씬 크고 본질적인 ‘공익’인 것이다. 개인의 이익은 물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익의 보호를 위해 그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의 훼손을 용인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체벌로 지켜지는 질서나 안정’에 대한 저들의 변함없는 믿음이 경이롭다. 체벌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손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며, 우리가 누리는 이 안정과 질서를 버텨주는 ‘안전판’이라는 저들의 믿음은 신실하다 못해 경건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은 체벌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교육 환경 때문에 잃을지도 모르는 교권을 지켜주고 교실 붕괴를 막아줄 것이라며 ‘체벌 금지 불복종’을 선언한 일부 교원단체의 생각을 닮았다. 이들은 마치 ‘체벌’을 모든 교단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처럼 여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자신도 그 ‘전가의 보도’가 단지 ‘칼집의 칼’에 그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을 저지할 수는 있지만, 체벌이 단기적인 수단에 그친다는 걸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인 것이다. 필요할 때 아이들을 통제하고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게 그들을 안심시키는 걸까. 그래서 그걸 잃는 걸 애통해하고 체벌이 ‘교실 붕괴’나 ‘교권 실추’를 막아준다는 믿음을 내면화하는 것일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나는 모든 교사가 이런 현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체벌이 교사의 지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굳이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체벌’이라는 수단이 교권과 무너지는 교실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버텨내기에는 현실은 훨씬 앞서가고 있고 이제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사들도 없는 것이다.
‘맞아도 싼 아이들’은 없다
일선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변화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좀 더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다(<한겨레> 사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억압과 통제로 아이들을 변화시키기에는 아이들은 물론,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다. 억압과 통제가 아니라, ‘자존감과 자율적 통제력’을 길러 줌으로써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믿음이다.
체벌을 통해, 선량한 다수의 학습권을 보호하고 인권을 지키자는 발상은 비인권적인 수단으로 인권을 지켜나가자고 하는 자가당착일 뿐이다. 그것은 ‘조국의 발전을 위해 인권을 유보하고 일정한 독재를 용인하자’라는 오래된 논리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맞아도 싼’ 행위는 있을지 모르지만, ‘맞아도 싼 아이들’은 없다. 인격적 존중은 멀고 매는 가까운 게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매로써 아이들을 다스리는 한 물리적 폭력으로 유지하여야 하는 질서라는 악순환을 벗을 수는 없다. 체벌에 대한 해묵은 논의가 한갓진 방법론이 아니라 기본적 철학의 문제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2011. 3. 17. 낮달
*내게 ‘체벌’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다가도 생기는 이유가 있다. 부끄러운 과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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