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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사내애’들에 ‘적응하기’ 한 달

by 낮달2018 2021. 4. 6.

▲ 교정의 벚꽃. 한 송이가 서둘러 피었다. 

남학교에 와서 사내아이들과 수업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사내아이들을 겪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도 어쩐지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맡은 반은 모두 이과 반이다. 문과 반도 국어보다 수학을 잘한대서 ‘수학고등학교’라고도 불린다는 학교다. 수학적으로 사고하기를 즐기는 아이들에게 ‘문학’은 좀 멀다. 그건 감성과 이성 양 측면에서 모두 그렇다는 얘기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

 

비슷한 학력을 가진 집단이라면 여학생들은 언어영역에서 남학생은 수리 영역에서 평균 3, 4점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게 보통이다. 단순한 성별 차이가 아니라 뇌 구조 상으로도 증명되는 경향이란다. 그래서일까, 전임지에서의 국어 시간이 은근히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전임지에서 겪은바 여자아이들은 국어 시간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모든 아이가 강의에 집중하면서 교사의 설명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는다. 잘 정리된 이 아이들 교과서는 거의 경이롭다. 정말 내 수업이 맞나 싶을 만큼 강의의 핵심을 제대로 정리해 놓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정교한 ‘3도 인쇄’로.

 

태도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아이들은 거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른다. 아이들 감성은 또 얼마나 예민한가. 시답잖은 우스개에도 아이들은 자지러질 듯 웃어댄다. 이른바 여학교에서만 누릴 수 있는 수업의 ‘잔재미’다. 특히 시 수업에서 아이들은 느낌으로 그걸 받아들이니 얼마나 수월한가.

 

▲ 휴대전화를 들이대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내애들이 재미없는 건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건 만만치 않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수업에 심드렁하다. 나는 국어 수업만 그런가 했지만 다른 과목의 수업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심드렁한 분위기쯤이야 얼마든지 좋다. 문제는 수업이 진행됨에 따라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놈들을 깨워가며 수업을 꾸려가야 하는 거다. 동료는 ‘상처를 받을 줄 모른다’라고 내게 경고한 바 있었다. 무어, 상처까지야……, 하고 받았지만 이건, 예사롭지 않다.

 

여학생들도 졸음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처럼 아예 대놓고 잠에다 몸을 맡기지는 않는다. 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업에 조는 아이들은 손꼽을 정도다. 그런데 사내아이들은 마치 전염이나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허물어지곤 하는 것이다.

 

▲ 쉬는 시간의 고3 교실. 아이들은 종이 울리자마자 ‘널브러져’ 버린다.

그뿐이 아니다. 정작 여학생이라면 화들짝 웃음을 터뜨려야 하는 대목에서도 이 위인들은 심드렁하다. 기본적으로 좀 둔감한 게 사내애들이긴 하지만 이쯤 되면 입맛이 쓰다. 아이들이 그나마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여학생 이야기다. 자던 놈들도 깨어나 실실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곤 하니까.

 

덜 감성적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이들이 그렇게 졸아대는 이유를 깨달은 건 한참 뒤다. 3월인데, 벌써 그러면 어떡하냐고 되물으면서도 나는 아이들이 선 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임지의 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 아이들도 선발 고사를 치르고 진학한 아이들이다. 성적으로 치면 상위권이고, 말썽도 잘 부리지 않는 ‘범생’이들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지쳐 있다.

 

아이들은 벌써 ‘지치고 있다’

 

아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혹사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전이다. 아침 8시부터 옹근 9시간. 10시까지 야자, 그리고 학원, 독서실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일과는 자정을 넘겨 새벽 한두 시가 되어야 끝나곤 하는 것이다. 한창때의 사춘기라지만 연일 계속되는 일과에 배겨날 재간이 없다. 아이들을 연민 없이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사내아이들이 받는 성적 스트레스는 여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더구나 가부장제의 전통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경상도에서라면 더더욱. 며칠 전 열린 학부모총회에 거의 5백여 명에 이르는 학부모가 참석한 것은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어떤 수준인가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자기 능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달을 넘기면서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집단으로서 아이들은 좀 데면데면하고 무례해 보인다. 말수가 적은 대신 어쩐지 말투에 불량기가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유 있는 피로’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은 어쩐지 가엾어 뵌다.

 

그래서일까.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모두가 착하고 반듯하다. 외양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거지도 그렇다.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자, 아이들은 내게 한 발짝씩 더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렇다, 사내아이들이라고 무어 그리 다르랴. 이들도 결국 아이들일 뿐인걸.

 

국어에 무심하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뜻밖에 기초 학력이 탄탄하다. 문학의 배경지식이든, 어법이든 물어보면 반드시 아는 아이들이 있고, 그중 두엇은 ‘제대로’ 알고 있다. 전임지에 근무한 적이 있는 동료 국어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의견 통일을 본 부분이다.

 

▲ 교정의 벚꽃. 터지기 직전의 꽃망울이다.  저 너머로 금오산이 보인다.

“국어에 심드렁해 해도 정작 물어보면 알 건 다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지요? 애들이 생각보단 꽤 기초가 탄탄해요. 여자아이들은 다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작 물어보면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을 제대로 알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름을 외우고 이름과 얼굴을 맞추고 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속살 같은, 아주 강해 보이지만 오히려 연약한 어떤 부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런 모습들을 아울러 아이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수업에 드는 힘이 얼마간 줄어드는 느낌이다. 첫정을 주기가 쉽지 않지, 사내아이들은 정을 주고 나면 이내 살갑게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속을 끓인 지난 시간이 아득해진다.

 

교사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벚나무 몽우리가 한창이다. 일주일이나 열흘쯤 지나면 창문 너머로 눈부신 벚꽃의 향연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내 5월, 전입 첫해의 1학기는 시나브로 그렇게 무르익어 가고 있다.

 

 

2012. 4.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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