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문어’, 한자어의 흔적들
‘글로 쓰는 문장이 입으로 말하는 언어와 일치되는 현상’이 언문일치(言文一致)다. ‘언문일치’라는 개념은 ‘언문 불일치’를 전제로부터 비롯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랫동안 한자를 빌려 써 입말[구어(口語)]을 그대로 글말[문어(文語)]로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글말과 입말의 일치, ‘언문일치’
우리말의 언문일치는 교과서의 한글 전용과 1980년대의 일간지의 한글화를 통해 한글이 주류 통용 문자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그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입말과 글말이 특별히 다르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옛 편지글에 남았던 문어의 흔적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편지글에서 공공연히 쓰이던 상투적 문구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자기 부모님께 편지를 쓰면서 ‘부모님 전(前) 상서(上書)’라고 쓰는 이는 없다. 당연히 ‘기체후(氣體候) 일향(一向) 만강(萬康)’이나 ‘별래(別來) 무양(無恙)’ 따위의 문구도 쓰지 않는다. ‘옥체(玉體) 만안(萬安)·만강(萬康)’도, ‘가내(家內) 균안(均安)’을 묻지 않으며, ‘앙망(仰望)·앙축(仰祝)’도 더는 쓰지 않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한글 전용 정책이 이루어낸 성과다. 그래도 일상 언어생활에서 문어체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니라’와 같은 종결어미가 쓰인 기독교 성경은 서술은 문어체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기독교가 들어오던 시기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는 이 독특한 문체는 성경의 권위를 일정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일상에서 쓰이지 않고 문어로만 쓰이는 어미도 있다. 요즘에는 거의 드물어졌지만 ‘하나이다’나 ‘하소서’와 같은 어미는 연하장이나 기도문, 제문 등, 기원하는 글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
생활 속의 문어의 흔적들
그러나 일상의 곳곳에는 아직도 문어체에나 쓰이던 한자어가 꽤 많이 엿보인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한때 의례적인 문서에는 한자가 많이 쓰였다. 거의 토만 한글을 달던 국한문혼용체의 흔적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상장이나 표창장의 쓰이는 문구다.
“상기 학생은 2017년 교내 백일장에서 두서의 성적을 거두었기에 이에 상장과 상품을 수여함.”
“상기 학생은 평소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에 표창함.”
‘상기(上記)’는 ‘위의’로, ‘두서(頭序)’는 ‘위와 같은’, ‘수여함’은 ‘줌’으로 쓰면 훨씬 더 간결하고 쉬운데 이걸 굳이 한자어로 썼다. 정작 그 상을 받은 아이들은 그 뜻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품행을 말할 때 곧잘 썼던 ‘방정(方正)하다’는 고유어 ‘방정맞다’와 비겨지며 우스개가 되기도 했고 ‘타(他)’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같은 상을 주면서 시상자가 줄곧 뇌던 ‘이하동문(以下同文)’도 요즘은 풀어서 ‘내용은 같습니다’로 쓴다. ‘대독(代讀)’도 ‘대신 읽었다’ 정도로 순화되었다. 결국 시대가 문어를 구어로 바꾸어낸 것이다.
인사말 따위에서 흔히 쓰는 ‘심심(甚深)하다’도 이제 슬슬 자취를 감추고 있다. ‘심심한 감사’ 대신 ‘깊은 감사’가 훨씬 간절한 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잘 이해해 달라’고 쓰는 ‘양지(諒知)’도 ‘살펴’ 정도로 쓰면 충분할 텐데 여전히 쓰이고 있는 듯하다.
설날 전후하여 어르신들이 쓰는 말로 ‘과세(過歲)’가 있다. ‘과세 잘하시게.’나 ‘과세 잘하셨는가?’ 정도로 쓰이는데 들을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 ‘과세(課稅)’를 생각하곤 했다. ‘설을 쇠다’는 말을 무어 그리 어렵게 쓰나 싶은 생각은 지금도 버리지 못한다.
수인한도와 탑재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양해함.’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 ‘해량(海諒)’이나 ‘혜량(惠諒)’이 있다. 이도 굳이 써야 한다면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로 쓰는 게 오히려 뜻을 명확히 할 듯한데도 여전히 이런 표현을 쓰는 문서가 많다. 실제론 은근히 권위가 묻어나는 낱말이다.
‘비좁다’거나 ‘싸다’로 쓰면 간단명료할 텐데도 굳이 ‘협소(狹小)’나 ‘저렴(低廉)’처럼 한자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휠씬 격식을 갖춘 말이라고 여기는 까닭일까. 경상도에서 많이 쓰이는 ‘헗다(헐하다의 준말)’에서도 ‘헐(歇)’은 한자다.
“……수인한도 내의 경미한 소음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것도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승강기 안에 붙은 안내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수인(受忍)’은 참는다는 말인데, 국어사전에도 ‘수인한도’만 나와 있다. 법률용어로 주로 쓰이는 말 같다. 층간 소음 문제에 대한 당부를 적은 글인데 거기 쓰인 ‘수인한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참을 수 있는’으로 쓰면 오히려 더 잘 전달될 터인데 말이다.
누리집에 자료 같은 걸 올리는 걸 가리켜 ‘탑재(搭載)’라고 쓴다. 원래 ‘탑재’는 ‘배, 비행기, 차 따위에 물건을 싣다.’의 뜻으로 ‘항공모함 탑재기’나 ‘미사일을 탑재한 전폭기’ 따위로 쓴다. 그런데 누리집에 자료 게시하는 걸 굳이 어렵게 ‘탑재’로 쓸 일이 있을까. ‘올리다’, ‘게시하다’로도 족하지 않을는지.
아마 이도 문어가 하나씩 구어로 바뀌어 온 것과 같은 경로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물론 생활의 요구나 필요가 그 변화를 이끌어 갈 터이다. ‘노견(路肩)’을 ‘갓길’로 ‘인터체인지(interchange)’를 ‘나들목’으로 바꾸어내는 게 언중의 지혜니까. 물론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긴 하다.
2018. 1.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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