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어를 대체하는 영어
일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 “알파벳, 괄호 밖으로 나오다(2)”은 별 호응이 없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채택되지도 않았고 의미 있는 조회 수의 변화도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왕하던 이웃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댓글이 달리는 경우는 드물어서 조회 수는 어떤 의미로든지 독자들의 관심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였었다.
한글이 ( )안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찌 어찌하다가 정년 퇴임한 선배 국어과 교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도 <제이티비시(JTBC)>의 뉴스룸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어떤 경로든지 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알파벳이 괄호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 한글이 대신 괄호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선배가 방송사에도 이의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나는 내가 늘 국외자로서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쳤을 뿐, 정작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제이티비시(JTBC)>에 이 문제를 시청자 의견으로 올렸다.
어저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가서 명절날 거는 펼침막을 만들 때, ‘행복한 설날 되세요’와 같은 비문을 쓰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예의 바르고 신중한 소장은 나중에 현수막을 만들게 되면 참고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선배와 통화할 때는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며칠 전 뉴스에서 들은 영어 문구가 마음속에 계속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무슨 기사인지는 잊었는데 기자는 보도 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큐 앤 에이(Q&A) 형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기자들이 ‘핫(hot)하다’를 무의식적으로 쓰는 것과 닮아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 세대의 ‘문답’이란 낱말이 영자 ‘큐 앤 에이’로 바뀌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인가. 눈으로 보는 ‘Q&A(큐 앤 에이)’와 귀로 듣는 ‘큐 앤 에이’는 결이 전혀 달랐다.
‘큐 앤 에이(Q&A)’와 ‘문답’ 사이
신문 잡지 등 기록매체에서 어떤 중요한 화제를 다룰 때, 독자의 편의를 위해 쓰는 게 ‘문답’ 형식이었다. ‘새로 바뀌는 세제에 대한 10문 10답’이니, ‘우루과이 라운드 20문 20답’의 형식으로 쓰였던 그 형식은 바야흐로 글로벌 형식인 ‘큐 앤 에이’로 진화한 것이었다. ‘큐(Q)’가 ‘질문(question)’이고 ‘에이(A)’가 ‘답변(answer)’이라는 걸 요즘 세대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어느 뉴스콘텐츠의 기사 제목도 ‘△△ Q&A’다. 검색해 보니 큐 앤 에이를 쓴 이미지가 적지 않았다. 큐 앤 에이가 귀에 선 것은 내 감각이 ‘글로벌’하지 못한 탓인가. 그러면 나는 이 글로벌 시대의 지체아인 셈인가.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얘길 했더니 딸애가 무심히 받았다.
“저희 세대는 그걸 더 편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 세대를 특정하지 않고 방영되는 방송인데? 저걸 낯설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요…….”
“…….”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딸애는 대화를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순간 나는 내 의식이 이른바 ‘꼰대’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꼰대는 ‘남에게 자기 생각을 주입하듯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위키백과>)이다.
우리 학창 시절 때 꼰대는 교사나 부모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당시에도 그 뜻은 비슷했다. 꼰대는 낡고 고리타분한 가치관으로 우리들의 사고나 행동을 얽매려고 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시방 그 꼰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인가.
굳이 불필요한 영어를 쓰는 대신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 쓰기를 고집하는 내 모습은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의 모습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국제화 시대에 우리 말글 쓰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게 완고한 국수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십 년도 넘게 명절마다 ‘한가위 되세요’ 같은 비문의 인사법에 대한 주의를 환기했건만 날이 갈수록 상황은 개선되기보다 더 나빠지는 쪽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그러니 십 년 이상 한결같이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모습이 겸연쩍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멀쩡하게 우리말로 쓰던 낱말도 요즘은 본래의 외래어로 되돌아갔다. ‘조리법’이나 ‘전설’로 써도 충분한데도 이를 굳이 ‘레시피’나 ‘레전드’로 쓰는 게 대표적 사례다. ‘이메일’이나 ‘팩시밀리’가 보편화되면서 ‘전자우편’이나 ‘모사전송’(알맞은 대체어라고 할 순 없지만) 같은 말도 서서히 잊히고 있다.
우리는 정말 ‘꼰대 국수주의자’일까
때로 우리말 대체어가 원말의 뉘앙스를 고스란히 담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어로 쓰면서 익게 되면 자연스레 원말의 뉘앙스도 옮겨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대체어를 무시하고 외래어를 쓰는 것은 영어를 우리말보다 더 고상한 언어를 이해하는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아니할 수 있을까.
실제로 나는, 혹은 우리 세대는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세대일 수 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우리말 쓰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국수주의자이고, 시대의 흐름을 좇지 못하는 지체아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록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갈무리하는 것이 이 대세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 1.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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