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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띠’? 광화문, 혹은 세종대왕 수난기

by 낮달2018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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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 논란과 근처에 들어선 국적불명의 ‘아띠’

▲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뒤에 ‘門化光’ 현판을 단 광화문이 보인다.

광화문광장이라곤 딱 한 번 가 봤다. 지난해 1월 말께였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누굴 만나느라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거기 만만찮은 크기의 세종대왕 동상이 딱 버티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게 광화문광장이었구나 했던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서울을 이해하는 건 늘 그런 방식인 모양이다.

 

세종대왕은 뒤편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등지고 꽤 높은 좌대에 앉아 있었다. 세종임금은 반대편에 칼을 집고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광화문광장의 상징 같아 보였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두 분 임금과 장수가 경복궁을 등지고 앞뒤로 앉고 서 있는 모습은 괜찮은 그림 같다.

 

논란의 중심이 된 ‘광화문 현판’

 

세종대왕과 그 뒤편의 광화문은 지난해부터 꽤 긴한 뉴스거리였던 것 같다. 처음은 광화문 현판 때문이었다. 복원된 광화문에 새로 달 현판을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현판(유리 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 글씨로 쓴다고 하면서 광화문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 여러 사람의 필적으로 만들어 본 광화문 현판
▲ 지난해 8월 9일의 한글 사랑 단체들의 기자회견  ⓒ 한글문화연대

한글학회를 비롯한 한글 사랑 단체들이 ‘한글 현판’을 주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점일획도 틀린 게 없다. 이들은 ‘세종로와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얼굴이니 마땅히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거기 한자 현판을 다는 것은 광화문 앞에 모셔 놓은 ‘세종대왕을 능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광화문광장에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동상을 세워놓고 선전하면서, 그 앞의 큰 볼거리가 한자 현판을 단 광화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새로 지은 건축물로서 21세기 대한민국의 상징물’인 광화문에 한자 현판을 다는 것은 그러한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광복절 65주년에 맞춰 공사를 마친 광화문에 단 현판은 역시 한자 현판이었다. 그게 나라글자인 ‘한글’을 바라보는 이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수준이다. 한글학회에서 우려한 대로 광복 65주년 행사를 취재한 외국 방송 기자들이 찍어간 한자 현판을 단 광화문 배경을 보면서 외국인들은 한국이 아직도 중국의 문자를 빌려서 쓰는 줄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한자’ 현판에서 ‘균열’까지

 

멀쩡한 제 나라글자를 두고도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 ‘사고의 식민성’은 곳곳에 남아 있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 상징도 무궁화 꽃잎 안에 든 중국 글자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유력 신문사의 제호는 아직도 한자를 버리지 않고 있다.

 

광화문의 한자 현판은 한글을 읽는 우리의 관습에 따르면 ‘門化光’이다. ‘세종대왕 동상 뒤에 한자 현판이 웬 말이냐’며 시위를 벌인 한글 사랑 단체의 펼침막에도 ‘광화문 門化光’을 되풀이해 써서 ‘門化光’이 잘못임을 통박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145년 전,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던 광화문 현판은 그 후 3개월도 안 되어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균열이 발생함으로써 복원과정이 날림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도 광화문은 오른편 ‘광’자 부근이 아래위로 길게 균열이 난 현판을 달고 서 있는 것이다.

▲ 균열이 일어난 광화문의 현판.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광화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은 듯하다. 오늘 자 뉴스에 따르면 서울시는 15일 개장하는 세종문화회관 지하의 대규모 식당가에 ‘국적 불명’의 단어로 이름을 붙여서 논란거리가 된 것이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세종문화회관 지하 4천368㎡에 900여 석 규모의 외식공간인 ‘광화문 아띠’를 연다는 것이다.

 

‘아띠’는 시민 공모를 통해 선정한 것으로 ‘친한 친구, 오랜 친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서울시는 설명하고 있으나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은 물론이거니와 고어사전과 어원사전 등에서 올라 있지 않은 말이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도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순우리말이라는 공식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글 마루지’(랜드마크)에 웬 ‘아띠’?

 

이 식당가에 붙은 이름이 ‘광화문의 수난’으로 여겨지는 것은 서울시가 세운 ‘한글 마루지’ 조성 계획 때문이다. 한글 마루지(‘랜드마크’를 뜻하는 우리말 조어)는 서울시가 세종대로 주변의 통의·통인·내수·세종로동 일대 47만㎡에 조성키로 한, 한글과 관련된 마당과 공원, 게스트하우스 등을 갖춘 한글 문화관광의 중심지인데 이 구역에는 세종문화회관도 포함돼 있다.

 

서울시의 한글 마루지 조성 계획은 빵빵하다. 우선 올해 상반기에는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한글 11,172 마당’을 만든다. ‘11,172’는 이론적으로 한글 자모 24자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글자의 총수이다. 시는 가로세로 각 10cm 크기의 돌 포장석 1만1172개에 한 글자씩 써서 바닥에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기념 시범 거리를 조성하고 주시경 기념공원을 만들며, 통인동 자하문로 일대에 세종대왕 생가를 복원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한글 사랑방(게스트하우스)을 운영하고, 한글 홍보를 위해 한글 독음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국제선 항공기와 외국의 한국어 보급기관인 세종학당 등에 제공하고, 한글 자모를 활용한 벤치와 도로 시설, 표지판 등 공공디자인과 픽토그램(그림문자) 공모전도 개최할 예정이다.

 

글쎄, 서울시의 계획은 거창하고 좋다. 한글 마루지 사업의 기획과 집행을 단순히 ‘일’로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긴요하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이 있고, 그를 기리는 거리가 있고, 그가 훈민정음을 창제한 경복궁이 있는 거리에 조성되는 한글 마루지 사업에는 마땅히 ‘나라글자 한글’에 대한 주체적인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당가인 ‘광화문 아띠’ 건으로 한글 마루지 사업은 들머리부터 스타일을 구겨 버린 듯하다. 서울시 사업에는 유달리 외래어가 선호되는 것 같다. ‘한강 르네상스’가 그렇고 ‘디자인 서울’이 그렇다. 하기야 서울시가 지자체 상징 구호(브랜드 슬로건)로 ‘하이 서울’을 쓴 이래 전국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이를 따랐으니 허물을 서울에만 물을 일은 아니다.

 

수도 서울의 도심, 가장 상징적인 공간에 세종임금이 좌정하고 계신 것은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국자를 창제한 군주의 뒤편에 ‘광화문’ 아닌 ‘門化光’ 현판을 단 광화문이 서 있다는 것은 이래저래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한글 마루지 사업보다 그쪽이 더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2011. 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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