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가 제기한 ‘지식인론’
“이외수, 지식인은 아니고 글은 위선적이다…….”
마광수 연세대 교수가 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한겨레>기사 보기] 어떤 누리꾼이 ‘화천군민이 불과 2만5천 명인데 이외수 작가를 위한 감성마을에 100여억 투자!’라는 윤 아무개 목사(대선 때 ‘십알단’을 이끌며 불법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그 사람)의 주장을 자신의 누리집에 올리자 거기 단 댓글을 통해서다.
“내가 어릴 때 화천에서 살았는데, 정말 가난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군민 혈세로 미친 × 호화 주택이나 지어주고 있으니 우리나라 행정가 나으리들의 무지몽매함이 드러나는고나.
이외수 옹은 전문대학(2년제 교육대학) 중퇴라서 지식인이 아니다. 이외수 씨를 조금 아는 사이라 그 사람 글이 위선적이라고 까는 글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못했지만 나도 점점 그 사람이 싫어져요. 그 사람 글은 모두 얄팍한 교훈에다가 황당한 신비주의를 짬뽕해 놓은 글이라서요. 질투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댓글로 단 글이어서인지 짤막한 글이다. 그러나 글에 드러난 내용은 그 길이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이 글에 따르면 “이외수는 ‘미친 ×’이고 ‘전문대 중퇴’의 ‘비(非)지식인’이다. 아는 사이라 까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은 ‘위선적’이다. ‘모두 얄팍한 교훈에다가 황당한 신비주의를 짬뽕해 놓은 글’이어서 그가 점점 싫어진다…….”
자연인 마광수가 자연인 이외수가 맘에 안 든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다. 그게 그의 취향이든 판단이든 말이다. ‘질투’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말을 덧붙인 걸로 봐서 다소 시샘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니 그 역시 자연인의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로로 여기면 그뿐이다. 정색하고 들여다볼 필요까지는 없는 가십거리로 넘길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그의 발언을 되씹어 보는 것은 그가 밝힌 ‘감정적 소회’에 예사롭지 않은 낱말들이 눈에 띄어서다. 그는 화천군이 ‘미친 × 이외수’에게 베푸는 ‘특혜’를 비난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집권 여당 소속의 화천군수가 공식 해명을 한 게 있으니 따로 시비를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는 작가 이외수의 학력을 들어 그가 ‘지식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작가가 예전의 2년제 교육대학을 중퇴한 것은 지적한 것이다. 이외수는 ‘개나 소나’ 가는 ‘4년제 대학’도 아니고 고작 ‘2년제’를, 그것도 ‘중퇴’까지 했으니 ‘고등교육을 받아 지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위키백과)의 범주에 들기엔 한 뼘쯤 모자라니 그의 지적이 형식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겠다.
지식인과 ‘학력’
그러나 ‘지식인’을 규정하는 것이 고작 그 알량한 ‘학력’일까. 그 알량한 학력에 기대어 문학박사 마광수는 교대 중퇴의 작가 이외수에게 ‘놈’자를 놓고 그를 지식인의 위상에서 밀어내고 있는가 싶어서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식인’을 규정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다. 지식인의 학술적 규정 따위를 살펴볼 일도 없을 듯하다. 그러나 ‘다양한 개념에 관한 연구, 노동, 질문 및 응답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지식인의 정의(위키백과)는 새겨 볼 만하다. 그 정의 뒤에 붙인 ‘사르트르가 제시한 지식인들의 의무’도 곱씹을 만한 의미가 담겼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여섯 가지 의무를 두 사람의 삶과 문학과 견주어 보면 어떨까.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민중문화를 고양’하고, ‘지식의 보편성, 사상의 자유, 진리’를 되찾으며, ‘모든 권력에 대항’한다는 ‘지식인의 의무’에 누가 더 가깝게 살았을까. 누구의 삶이, 거기서 더 멀까.
내가 아는 마광수나 이외수에 대한 정보는 평균적인 시민의 그것을 넘지 못한다. 마광수가 자신의 고유한 글쓰기, ‘표현의 자유’ 문제로 군부 독재 시기에 면직되고 구속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글쓰기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
<즐거운 사라>가 외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나는 그러한 문학의 방식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학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이 설 공간은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때 내가 그가 받았던 탄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외수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그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우리 집에서 받고 있었던 월간종합지 <세대(世代)>를 통해서였다. 그의 데뷔작인 ‘훈장’이 ‘세대문학상’ 수상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작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한데 묘하게도 ‘당선 소감’의 한 구절이 지금도 떠오른다.
“창자에게 미안하다. 너무 굶어서. 흐흐흐.”
일탈적 삶과 집요한 방식의 문학 추구로 유명세를 치렀던 그다운 당선 소감이었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위악’이 그리 싫지 않았고 그의 소설에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겼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내 서가에 그의 작품은 딱 한 권밖에 없다. 그것도 내가 산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가져다준 책이다.
장편소설 <들개>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 무렵부터 그는 대중소설과 본격소설 사이를 위태하게 오갔던 것 같다. <들개>는 재미로 치면 읽을 만하다. 그러나 세련된 신파극을 본 듯한 씁쓸한 뒷맛을 남겼던 작품이었다. 나는 그걸 끝으로 이외수의 소설을 더는 읽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의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선 나는 아는 바 없다.
독자로서의 내 주관적 평가와 무관하게 그는 문단의 비주류로서는 드물게 만만찮은 고정 독자를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은 그가 자신의 문학작품을 통해 획득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매우 넓고 크다.
작가 이외수와 ‘트위터리안’ 이외수
이외수가 새롭게 떠오른 게 2000년대 후반, 수상집 <하악하악>(2008)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무렵부터 부쩍 인터넷에 그에 관한 기사가 넘쳤고, 우리 사회의 삶과 현실에 대한 그의 발언이 무르익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무렵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를 해석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내는 그의 ‘관점’을 중심으로 그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는 주변에 ‘작가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일관된 관점과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는 재평가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외수는 공식적으로 독재정권에 협력한 적도 거기 적극적으로 저항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사상적 태도 역시 좌우라는 개념으로 재기보다는 상식과 비상식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사회적 관계망(SNS)을 통해 던지는 발언의 맥락을 살펴보면 그런 점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트위터에 오르는 그의 말하기(글쓰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의 각종 이슈나 의제에 관해서 국민의 눈높이에 비겨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는 진보나 보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식과 반(비)상식을 가르는 통쾌한 말하기로 결국 15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이른바 ‘트위터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지난 총선이나 대선 국면에서도 그는 중립적 스탠스를 버리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아쉬움이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겐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가 이외수가 움직이는 영역이고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외수는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 아니겠는가.
뒷이야기
마광수의 발언에 진중권 교수가 트위터에 “여기 또 한 분 곱게 늙기 국민운동을 제안합니다”라는 글을 남기며 논란이 이어지는 모양이다. 진중권은 “솔직히 마광수 교수님도 유식하진 않으셔요”라는 멘션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속 보도는 마 교수가 <JTBC>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격식을 차리지 않은 개인적인 글’이라며 “실언이다. 사과드리고 싶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외수 작가도 역시 “개인적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담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했다니 이는 한 차례 촌극으로 막을 내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고려대 교수 이기식이라는 이가 칼럼을 통해 ‘이외수 감성마을’을 비판하면서 “그 뒷면에는 우리의 좌우 대립 구도가 반영되어 있다”라고 일갈했단다. 그는 “우파는 국민의 세금으로 작가가 아방궁과 같은 사치 생활을 한다는 것이고 좌파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박근혜 후보의 에스엔에스(SNS) 책임자라는 사실만을 부각시켜 좌우 대립 구도로 이어가려고 한다”라고 진단했다고.
글쎄, 이외수가 늘 그랬던 것처럼 상식의 관점에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일의 선후와 인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터인데 웬 ‘좌우 대립 구도’가 튀어나오는지 원. 그런 대단히 현학적인 분석과 ‘진단’이 ‘지식인다움’의 징표인지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2013. 1.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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