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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냄새나야 근로 능력 없다’?

by 낮달2018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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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 수급자의 근로능력 판단 기준

▲ 보건복지부 누리집에 오른 '근로 능력 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고시.

‘보건복지가족부 고시 2009-243(근로 능력 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고시)’의 내용이 논란이 되고 있다. 201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이 고시에서 말하는 ‘근로 능력 판단 기준’은 국민 기초 생활 수급자가 근로 능력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지금까지는 기초생활 수급자가 ‘질병·부상으로 인해 근로 능력이 없는 자’로 판정받으려면 의료기관에서 받은 근로능력 평가용 진단서를 제출하면 되었다. 그러나 올 1월 1일부터는 기초 생활 수급자가 근로 능력이 없는 자로 판정받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의 진단서를 내는 것 외에 시군구청 담당 공무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절차가 한층 까다로워진 것이다.

 

‘환상적’ 근로 능력 평가 기준

 

그런데 이 공무원에게 맡겨진 ‘평가 항목과 기준’이 문제다. 평가항목은 체력, 만성적 증상, 알코올중독, 취업 가능성, 외모 관리, 집중력, 자신감, 자기통제, 대처 능력, 동시 업무 수행 능력 등 모두 10가지다. 항목마다 0~4점의 점수를 부여하는데 점수가 낮을수록 근로 능력이 없는 걸로 인정받는 구조다.

 

문제는 이 기준들이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이 가능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객관적 수치를 매길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 평가항목이 수두룩하다. ‘집중력’ 항목이나 ‘자신감’ 항목의 경우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 평가가 될 수밖에 없는 형식이다. 특히 ‘외모 관리’ 항목의 경우는 이게 온전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싶을 정도다.

 

· 외모가 혐오감을 주거나, 심한 냄새가 난다.(0점)
· 철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옷이 늘 더럽다.(1점)
·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늘 같은 옷을 입는다.(2점)
· 외모 관리가 어딘지 어설프다.(3점)
· 외모 관리를 잘하고, 옷을 단정히 입는다.(4점)

 

언뜻 보면 외모 관리를 잘한 사람에게 점수를 더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점수가 낮을수록 유리하다. 반대로 점수가 높아서 근로 능력이 ‘있다’라고 인정되면 일을 해야 기초생활 급여가 지급되고, 의료급여도 2종으로 분류돼 진료비 부담이 커진다.

 

당연히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판정받기 위해서는 ‘혐오감’을 주거나 ‘냄새’가 나야만 유리하다. 이게 ‘법대로’를 외치면서 힘없는 사람에게 종주먹이나 들이대고 정작 자신들은 법을 무슨 장식처럼 여기는 잘난 대한민국 정부의 수준이다.

▲ 활동능력 평가항목별 기준. '보건복지부 근로능력 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고시' 중에서

외모를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편견의 제도화’일 뿐

 

자신이 원하는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더러운 옷을 입고 심한 냄새를 피우고 남에게 혐오감을 주어야 한다고 이 기준은 주장한다. 동정받아 마땅하게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근로 능력 부재의 증거다? 인권단체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다. 이 기준에는 국민을 대상화하고 자신들의 업무 집행을 무슨 ‘시혜(施惠)’처럼 바라보는 뒤틀린 시각이 담겨 있다.

 

▲ 힘이 되는 평생 친구라고? 정말?

이는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라 강변하고 ‘학교는 무료급식소가 아니’라면서 경기 교육청의 ‘무상급식 예산’을 삭감한 경기도 의회의 수준과 다르지 않다. 경기도 의회의 지엄하신 의원들이 무상급식이 ‘기본적이고 보편적 교육복지 정책’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보건복지가족부의 담당자들이 기초 생활 수급자에 대한 급여지원이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가 거기’인 것이다.

 

무료급식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드러내 놓고 ‘대상자’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매우 비교육적이다. 마찬가지로 ‘근로 능력 부재’를 증명받기 위해서 외모를 ‘관리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복지부의 고시는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외모와 행동’에서 부정적 모습을 보이리라는 잘못된 ‘편견의 제도화’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누리집의 시정 구호는 ‘힘이 되는 평생 친구’다. 그러나 평생 친구는 결코 친구의 외모나 행동만으로 그의 삶을 규정하지 않는다. 편견에 바탕을 둔 자의적 평가 기준으로, 스스로 ‘자신의 근로 능력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친구를 절대 능멸하지 않는다.

 

 

2010. 1.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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