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1894) 이후 120년이 지났다(2014년)
2014년은 갑오(甲午)년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 120년째, 1954년에 이은 두 번째 60년, 즉 2주갑(周甲)이다. 갑오년은 한편으로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해로도 역사에 기록된다.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갑오개혁’을 ‘갑오경장(更張)’으로 배웠다.
갑오 농민혁명(1894) 2주갑(2014)
120년 전 갑오년에 일어난 두 역사적 사건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갑오경장’을 더 친숙하게 느꼈나 보다. 박 대통령은 ‘120년 만의 갑오경장’을 환기하며 “120년 전의 경장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성공하는 경장의 미래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단다. 친절하게 ‘경장(更張)’은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는 뜻의 ‘해현경장(解弦更張)’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풀이해 주면서.
시기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갑오개혁은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드러난 민중과 개화파의 개혁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근대화’였다. 특히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제거한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고 일본군대의 힘을 빌려서 단행한 국정개혁이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의 한계는 명백한 것이었다.
개혁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침략적 간섭은 국민의 광범한 반발을 초래했다. 왕궁을 포위한 일본군대의 도움으로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세워진 친일 정부의 수반이었던 총리대신 김홍집이 아관파천(1896) 때 친일파로 몰려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살해된 것은, 당시 대중의 정서를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홍집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그의 수급(首級)은 백성들의 돌팔매를 맞아야 했다.
대통령이 ‘갑오경장’의 실패를 말한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살핀 결과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성공하는 경장의 미래’를 이야기한 것은 자신을 역할을 ‘경장’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당은 갑오년에 ‘경장’만이 아니라 ‘동학혁명’도 있었다는 걸 명념하라고 논평했지만, 자신을 개혁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대통령에게는 동학보다는 경장이 더 가깝게 느껴졌으리라.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서 동학을 ‘동학란’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역사학자 이이화에 따르면 동학농민운동은 ‘난’과 ‘혁명’, ‘운동’ 등의 명칭으로 불리다가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뒤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군사정권은 정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혁명은 동학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둘뿐이라고 강조하였다”라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개인의 견해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동학 접주여서 어릴 적부터 동학에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념탑 등에 반영되었다. 1963년에는 정부 주도로 황토재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졌고, 1973년에는 정부의 후원으로 천도교에서 공주 우금치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동학혁명이란 용어는 천도교에서도 수용되었다. 따라서 농민은 동학에 끼어들 틈이 없었는데 농민을 삽입하면 계급 투쟁적 성격이 강해진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이선근 등 어용 사학자들의 협조가 컸다.”
-<이이화의 못다 한 한국사 이야기>(푸른역사, 2000)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인 농민들을 이르던 명칭도 피아가 명백하게 엇갈렸다. 농민군 측에서는 ‘동학교도’라는 뜻의 ‘동도(東徒)’, 또는 ‘의병’이라 불렀다. 이 둘을 합쳐 ‘동도 의병’이라 하기도 했다. 당대의 지배 세력이었던 민 씨 정권과 개화파 정권, 일본군, 그리고 유림에서는 한결같이 ‘비적(匪賊)·비도(匪徒)’라 불렀다. ‘도둑떼’ 또는 ‘도둑의 무리’라는 뜻이다. 당시의 지배층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매천 황현도 이들을 ‘동비(東匪)’라 불렀으니 그 역시 양반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
정작 ‘난’이든, ‘혁명’이든, ‘전쟁’이든 갑오년의 농민 봉기는 사람들에게 ‘전봉준’과 ‘사발통문’, ‘조병갑’과 ‘만석보’, ‘공주전투’와 ‘우금치’ 따위의 단편적 어휘로만 기억된다. 고부에서 녹두장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봉기가 어떤 방식으로 발전하고 어떻게 소멸해 갔는지를 막상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고창군에서 개설한 ‘고창 동학농민혁명’ 사이트에서 서술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주요사건을 따라가 보았다.
사발통문, 고부에서의 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저항하던 전봉준(1854∼1895) 등 20명의 동학교도는 사발통문(어떤 일을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돌려 적어, 앞뒤 순서가 없으므로 누가 앞장섰는지 알 수 없게 한 문서)을 통해 거사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사발통문의 내용과 후속 논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각리(各里) 리집강(里執鋼) 좌하(座下)
우(右)와 같이 격문(檄文)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매일같이 난망(亂亡)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어 있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貪吏)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이는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군수 살해, 전주 감영 점령과 서울 진격’이 담겨 있는, 매우 강력한 무장봉기 계획이었다.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자 드디어 고부 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1월 10일, 고부 농민 5백여 명이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렸다.
농민군은 1월 25일 백산으로 진을 옮겨 한 달여 간 봉기를 이어갔지만, 조정의 수습이 이루어지면서 농민군에 대한 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다. 결국 3월 13일에 농민군은 모두 해산되고 전봉준 등은 무장의 손화중 포(包)로 피신하게 되면서 이른바 ‘고부민란’은 막을 내린다.
전봉준은 무장현의 손화중(1861∼1895)을 설득해 무장현에서 3월 20일 다시 봉기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1853∼1894) 등 연합 농민군이 완성되면서 이들은 농민혁명을 선포하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목표로 북상한다. 부안의 황토재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일시 남하하였다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니 이때가 4월 27일이었다.
전주성에 함락에 당황한 조정은 토벌군을 보내고 한편으로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여 5월에 청군 2,500명이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국을 끌어들인 것은 망국의 화를 자초한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조선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에 더할 나위 없는 출병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곧이어 6,300여 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결국 조선 정부는 안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청일 양군을 철수시켜야 하는 이중의 난관에 봉착했다. 이 양국 군대의 조선 진주는 농민혁명은 물론이거니와 근대 한국사의 전개에 커다란 굴절을 가져온 변곡점이 되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
경군(京軍)과 농민군은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산전투다. 화포로 무장한 경군과의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보게 되었다.
완산전투 이후 위기에 처한 농민군과 농민군의 해산을 노렸던 경군 사이에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으로 전봉준은 이른바 ‘폐정개혁안’을 제시한다. 농민들의 봉기 이유와 봉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절절히 담겨 있는 27개 조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크게 보아 네 가지로 집약된다.
①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처벌과 제거
② 삼정의 개선과 부당한 세금 징수의 원천적 철폐
③ 대원군의 국정 참여
④ 외국 상인의 불법 활동 금지
완산전투 이후, 양측은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경군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임금께 올린다’라는 조건으로 타협을 맺었으니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다. 이 타협은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으나 무엇보다도 청과 일본군대의 조선 진주라는 상황 변화의 결과였다.
전주성을 비워 주었지만, 전봉준과 김개남의 농민군은 여전히 전라도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이들은 신변보장과 폐정개혁의 실행을 계속해 요구하였지만, 정부의 수습방안은 농민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전라도 전역에서 농민군의 세력이 증대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6월 21일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었다. 전주성 철수 이후 내정의 안정을 들어 조선 정부가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억지 명분마저 잃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라고 협박하던 끝에 비상 수단으로 궁궐을 점령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갑오개혁 정권을 세우고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노골적으로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이 위기적 상황에 정부와 농민군이 협력하여 전라도 내의 안정과 치안 질서를 바로잡기로 약속하면서 각 군현에 설치 운영하기로 한 것이 집강소(執綱所)다. 집강소는 농민들이 지방 단위에서나마 행정력을 장악하고 이를 인정받은 것으로 집강소를 통한 권력 참여는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농민혁명에서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9월 재봉기, 우금치의 패배
경복궁의 침탈 소식 이후 호남 각지에서는 즉각 척왜(斥倭) 봉기가 이어졌다. 청일전쟁 이후 봉기는 확대되어 7, 8월부터 경상도, 충청도 등 삼남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전봉준은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 10만여 명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북상한다.
이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 충청도의 농민군이 함께 북상했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함으로써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 봉기가 이어졌다. 이후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농민군들의 봉기는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기세도 드높았지만, 농민전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기 시작했다. 관군이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1개 대대는 각각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10월 21일, 전봉준과 손병희의 농민군은 공주성을 둘러싸고 관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은 곧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록되는 이른바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농민군은 정예의 신식 군대인 일본군과 최신 병기의 화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천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내고 이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이 일본군 200, 관군 2,500여 명에 불과한 적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전투 수행 능력과 화력의 차이였다.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정예병을 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이었고 무장이래야 대부분 칼과 활, 죽창이었고 일부가 지닌 재래식 화승총도 사거리가 100보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금치의 패배 이후 농민군은 줄곧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새 세상을 열고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했던 농민들의 의지가 일제의 야욕과 무력 간섭으로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반일 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역설적이지만 동학군의 좌절 후, 거국적인 저항 한 번 못하고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농민군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체포, 처형되었다. 김개남은 12월 초순 태인의 매부 집에서 잡혀 전주에서 효수되고,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쌍암리)에서, 손화중은 부안면 수강산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일본에 협조하면 살려준다’라는 일본의 회유를 뿌리치고 이듬해 3월 30일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의연히 교수대에 올랐다.
이듬해 1895년 1월 대둔산 정상 부근으로 도피해 있던 농민군 25명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다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 가운데 기록에 전하는 가장 최후의 항전이었다.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한 채 저항하고 있었던,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한 26명의 농민군 가운데 소년을 제외한 스물다섯 명 모두가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혁명이 진압된 뒤, 농민군들에 대한 잔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데 가장 큰 장애 세력이었던 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토벌은 가혹했다. 관군과 향촌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에 의한 자의적인 살육도 뒤를 이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농민군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문서들은 20만 명 이상에서 40만 명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듬해 을미사변(1895) 이후 각지에서 조직된 의병대열에 합류해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匪類)’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런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곰보 목수 윤보는 바로 그런 이들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다시 ‘갑오 동학년(年)’에
동학은, 갑오년 농민전쟁이라 부르든, 동학농민혁명이라 부르든 간에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반추하고 기린다. 19세기 말, 그 중세 봉건사회의 한복판을 꿰뚫어 낸 농민들의 저항과 좌절, 그리고 이어진 국권피탈의 치욕적 역사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 '이 산하에'를 들으며 가마에 탄 채 압송되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녹두장군의 형형한 눈길을 떠올린다. 일본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그가 쓰고자 했던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져 갈 것인지를 내다보고 있었을까.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이후 한국인들이 반복 경험한 혁명과 반혁명 가운데 그 규모와 깊이에서 동학혁명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3·1 운동도, 4월 혁명도, 1987년 민주화 항쟁도 갑오년 혁명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농민 혁명군이 호남에 실현했던 민중 권력 수준에 도달해본 적은 없다고.[기사 바로 가기]
그는 동학혁명을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역사의 분기점’으로 본다. 그러나 ‘1894년의 대사건에 내포되어 있던 최선의 가능성은 스러지고’ 현실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외국군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농민 혁명군에 맞설 수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농민혁명의 승리가 필연적이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필연에 거역하기 위해 조선 핵심 지배층은 나라를 외국군의 전쟁터로 열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갑오년을 맞는 2014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120년 전의 상황과 놀랍도록 닮았다고 말하는 이는 한둘이 아니다. 대통령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하는 ‘경장’을 주문한 것도 같은 상황 인식의 결과일 터이다. 단지 그는 분노한 민초들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갑오개혁을 강제하는 주체의 일부였던 그 민중들 말이다.
물론 2014년은 120년 전, 1894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금은 봉건왕조 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고, 세습된 왕권이 아니라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꿈은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박근혜 정부가 120년 전에 실패한 경장을 성공한 그것으로 꾸려가고자 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2014. 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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