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월 말을 끝으로 나는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1984년부터 선 교단에 머문 시간은 31년, 정년을 세 해나 남기고 나는 이 ‘혹성’을 탈출한다. 동갑내기 친구들 가운데 지금도 직장 생활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들은 일찌감치 퇴직했기 때문이다.
2, 3년 전부터 예고된 50대 중후반 세대들의 은퇴 러시에 어느덧 나도 합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른바 베이비붐(baby boom) 세대, 한국전쟁 뒤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인구가 급증할 때 태어난 베이비부머(baby boomer)다.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는 전체 인구의 14.5%인 714만 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베이비붐 세대는 한평생 가정과 사회를 위해 애썼지만 아무 준비 없이 은퇴를 맞이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중 65%는 퇴직 준비를 하지 않았고, 72%는 재취업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은퇴자가 취업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지난해 취업자 가운데 50·60대가 80%가 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베이비 부머의 ‘은퇴 러시’로 드러난 사회의 민낯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처럼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 우리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 공포통치를 체감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근대화에 따른 발전을 체감하기 시작한 첫 세대이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 못지않은 힘들고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왔다.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을 일상적으로 경험했고 급격한 경제성장의 주역이었으면서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전 세계적 격변과 자산가치의 폭락 등의 경제적 몰락을 감내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퇴직 쓰나미를 우려하는 것은 이들의 은퇴 러시 후의 삶에 대한 예상이 별로 긍정적이지 않아서다. 앞서 밝혔듯 이들은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노후를 거의 준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선진 복지국가처럼 넉넉한 연금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이들의 퇴직은 곧 소득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년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가 은퇴 이후에 삶을 걱정하게 되어 버린 것은 확실히 역설적이다.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쳐 바야흐로 세계 십몇 위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되었지만 정작 이들의 노후 대비가 없었다는 것, 그게 이 땅의 쾌속 성장 자본주의, 그 민낯인 셈이니까 말이다.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는 바람에 남들과 같은 경력을 쌓진 못했지만, 어쨌든 20년 넘게 교직에 머문 덕분에 나는 3월부터 연금생활자가 된다. 내 명의로 한 주의 주식도, 한 평의 땅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넉넉한 노후 자금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그나마 아내 앞에서 체면이 서는 건 순전히 그 연금 덕분이다. [관련 글 : 베이비부머와 연금, 혹은 노후]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 러시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돌아보게 했지만, 은퇴는 한편으로 생물학적 연령 상한에 따른 세대교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정한 나이에 이른 이들이 현역에서 물러나는 것은 그들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세대가 현역으로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직에 명퇴 바람이 분 것은 연금제도의 개혁에 지레 겁을 먹은 이들이 서둘러 퇴직하고자 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초중등 교원의 명예퇴직을 확대해 신규 채용 규모를 늘리고자 한 정부의 ‘청년 고용절벽 해소 대책’의 일부였다.
노동 개혁 공방, 혹은 인위적 세대교체
지방 교육 교부금이 급격히 줄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일선 교육청에서는 명퇴 예산을 마련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고령 교사들을 내보내는 대신 젊은 교사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는 이 계획은 겉으론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올해 신규 채용을 포함해도 전국의 교원 정원은 오히려 2743명이 줄어드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의도한 정책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명퇴를 늘리는 방식은 양반이다.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과 취업규칙 개악 등을 추진하면서 ‘청년 고용’을 늘리겠다고 한다. 거기 ‘노동 개혁’이란 요란한 수사를 덧씌웠지만, 이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아버지의 봉급을 깎아서 자녀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데에 불과하다.
청년 실업 문제의 심각성이야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포세대’라는 새말까지 만들어 낸 청년 실업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의 과보호’를 손질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 온당하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정규직 노조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청년들을 앞세워 활용하고 있다’라는 지적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거칠게 줄이면, 이 노동법 국면은 청년실업의 당사자인 삼포세대의 일자리(그것도 불확실한!)를 위해서 베이비붐 세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말하자면 인위적 세대교체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다.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베이비 부머들은 퇴직에 앞서 임금조차 깎이게 생긴 것이다.
세대교체는 한 사회, 국가의 존속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그 세대에 걸맞은 세대문화가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라와 사회는 별다른 충격이나 불협화음 없이 승계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서둘러 퇴직하면서 시방 진행되고 있는 노정 갈등을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어쩌다 부모 세대가 자신의 임금을 줄여 자식 세대의 일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일까. 한평생 처자식을 위해 가쁘게 달려온 베이비 부머들에겐 그게 이중의 고통이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조병화의 시 ‘의자’를 떠올린 것은 그래서일 거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나는 이 시를 국어 교과서의 권두시로 배웠던 것 같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에게 ‘묵은 의자를 비워주겠다’라는 내용의 연이 반복되고 있는 이 시의 주제는 바로 ‘세대교체’다.
시에서 ‘아침’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고, ‘어린 분’은 새로운 세대를 가리킨다. ‘그분을 위하여’ 비워 드릴 ‘묵은 의자’는 사회적 지위를 표상한다. 교체될 새 세대를 일러 ‘그분’, ‘어린 분’이라며 존칭을 쓴 데서 화자의 겸허한 태도와 함께 새 세대에 대한 기대감이 드러난다.
새 세대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문장의 종결이 ‘비워 드리지요.’에서 ‘비워 드리겠어요.’를 거쳐 ‘비워 드리겠습니다.’로 변형 발전되면서 드러난다. 이 점층적 표현에서는 세대교체 또는 문화 전승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신념과 결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화자는 앞 세대였던 ‘먼 옛날 어느 분’으로부터 의자를 물려받았듯 이제 그 의자를 물려주려고 한다.
조병화 시인이 이 시를 쓴 의도는 알 수 없다. 한 사회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당위다. 시인은 그 당위성을 노래하면서 삶의 순환과 세대교체라는 역사의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과 같은 노정의 갈등과 대립을 넘어 순리적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날은 언제쯤일까. 앞선 세대가 뒤따르는 세대에게 자신들의 자산과 문화를 물려주는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의 계승은 언제쯤이나 이루어질 수 있을까.
‘대망(待望)의 2016년’이라는 익숙한 표현을 넘어, 새해 벽두에 구세대와 신세대가 민망하게 맞닥뜨린 이 서글픈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2016. 1.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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