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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분담’? 필요한 것은 ‘희생의 교대’다

by 낮달2018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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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신년 연설에서 요구한 ‘고통 분담’ 대신 ‘희생의 교대’

▲ 17대 대통령 취임식.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대통령 신년 연설의 화두는 ‘고통 분담’

 

새해 신년 연설(1월 2일 10시)에서 대통령이 강조할 화두는 ‘고통 분담’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경제 위기 속에서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 것인지,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 방향과 국민적 단합과 의지, 각 경제주체의 고통 분담을 호소”하리라고 한다.

 

‘고통 분담’은 나라가 어려운 시기마다 정치 지도자에 의해 강조되어온 익숙한 명제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상식’ 수준의 이해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 뜻을 새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라 안팎에 몰아치고 있는 경제 위기에 따르는 ‘고통을 나누어서 지는’ 주체는 물론 정부와 국민, 자본과 노동자, 혹은 부자와 빈자일 터이다.

 

나라의 어려움 앞에서 경제적 여유와는 무관하게 저마다 주머니를 기꺼이 여는 것은 우리 국민이 지닌 빼어난 덕성 중의 하나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집마다 깊숙이 넣어둔 가락지, 목걸이, 팔찌 등의 금붙이를 들고 은행 앞에 줄을 섰었다.

 

알다시피 IMF의 구제금융을 초래한 장본인들은 그들 서민 대중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인, 은행가 등 이 땅의 ‘잘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적 자금’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빠져나올 때, 가장 참담한 희생을 당한 이들은 결국 ‘없는 사람’들이었다.

 

‘있는 사람’들이 고금리와 기회에 환호하며 ‘이대로!’를 외치던 시기에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고 숱한 가정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와 지도자는 ‘분담’을 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자리’와 ‘가정’과 ‘가족의 유대’를 잃은,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전담’하면서 나라는 위기를 넘겼다.

 

그 표현도 ‘우아한’ ‘고용 시장의 유연화’로 쏟아낸 전체 노동자의 59%를 차지한다는 ‘비정규직’이나, 해마다 심화하고 있다는 ‘양극화’도 그 시기의 유산이라면 유산이다. 그리고 10년, ‘경제 살리기’를 기대하며 CEO 출신의 대통령을 뽑았지만 우리는 다시 위기 앞에 불안하게 서 있다.

▲ 부산, 2001.  육교 위에 걸인이 엎드려 있다. ⓒ 최민식

“아랫목에 불을 지피면 윗목도 따뜻해진다?”

 

‘강부자’나 ‘고소영’이라는 신조어가 아니라도 현 정부와 그 정책이 친자본, 친재벌적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똑같이 국제 금융위기에 부딪혔지만, 미국과 영국이 상위 5%의 ‘증세’로 가는 것과는 달리 정부는 ‘부자’와 ‘기업’에 혜택이 집중되는 ‘감세’와 ‘종합부동산세’의 무력화로 대응했다.

 

‘경제 좀 살려달라’는 서민들의 기대에 대해서 정부의 응답은 단순 무비(!)하다. ‘아랫목에 불을 지피면 윗목도 온기가 전해져 온다.’라는 것이다. 오로지 기업이 잘되어야 국민 경제도 더불어 발전하고, 공장이 잘 돌아가야 노동자들에게도 그 훈기가 전해져 올 것이라는 얘기다.

▲ 경제 위기는 서민을 직격한다. 사진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귀에 익은 이야기긴 하지만, 문제는 아랫목이 따뜻해져서 그 온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이미 아랫도리부터 슬슬 냉기가 사무쳐오고 있다. 게다가 약속은 달콤했는지 모르지만, 이 땅의 백성들은 온전히 그 ‘아랫목의 온기’를 나누어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정부 여당은 한술 더 떴다. “최저임금이 경제 수준에 비해 가파르게 올랐다”라는 노동부 장관의 언급이 있더니 그예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이다. ‘임금 교섭 2년 연장 방침’도, ‘근로기준법 완화 방침’도 노동부의 작품이다. 근로기준법 완화엔 재계의 요구를 반영한 ‘해고 요건 완화’, ‘재량근로제 범위 확대’가 포함될 공산이 크다고 한다.

 

공공기관의 멀쩡한 정규직 2만 명을 감축하고 비정규 인턴 1만 명을 채용하겠다는 정부니, 최저임금을 완화함으로써 고용을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무리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벼룩의 간을 빼 먹으라’라는 저임금 노동자의 항변에 숨은 것은 결코 억하심정이 아니다.

 

이쯤 되면 ‘고통 분담’의 본뜻을 새롭게 새길 수밖에 없다. IMF 구제금융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서민 대중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힘들지만 저기 ‘고지가 보인다.’라며 ‘진격 앞으로!’를 외칠 시기가 아니라는 건 정부만 모르고 있을 뿐, 모두가 아는 일이다.

 

경제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오바마가 밝힌 신뉴딜 정책이 병원 전산망, 학교 시설 확충 등 사실상 복지 재정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것은 한둘이 아니다. 재정지출을 확대하고자 하는 이 정책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경제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층이다.

 

‘변화 추구’라는 점에서 오바마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명박 정부가 선택한 정책이 ‘4대강 살리기’ 등의 토목 사업을 통한 경기부양이라는 점은 논외로 치자. 그러나 경제 위기에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 등 서민 대중에게까지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희생의 교대’다

 

국제 금융자본과 재벌의 지배 동맹 아래 진행된 ‘급진적 자유화’로 위기에 몰린 ‘민중 생존권’과 공동화될 위험에 이른 ‘민주주의와 국민 경제’에 관한 얘기는 줄이기로 한다. 그러나 이제 더는 ‘고통 분담’과 한갓진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포장 아래,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후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분배’ 대신 ‘성장’ 논리에 짓눌려 살아오면서 서민들은 ‘나눌 수 있을 만큼 큰 파이’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 파이는 커지는 듯하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거듭했고, 결국 그 파이의 크기와 ‘분배’는 무관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 데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아랫목에 불을 지피면 윗목도 온기가 전해져 온다.’라는 이야기가 낯익은 것은 그것이 변형된 ‘파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속적 발전과 풍요가 넘쳐서 그 낙수(落穗)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발전과 풍요를 맨몸으로 만들어온 서민들을 ‘종속 변수’로만 바라보는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허울 좋은 ‘고통의 분담’론은 늘 그 형평을 잃으면서 어느 일방의 희생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리고 그 생생한 역사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담’ 대신 ‘희생의 교대’다. 이 땅에서만 꼬리를 감추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덕적 책무가 지금 새롭게 새겨져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008. 12.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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