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을 물어온 대자보
한 대학생의 글이 대학과 2013년의 한국 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적지 않다. 그것은 살기 바빠서든,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냐고 냉소해 왔든 일신의 안녕만 돌아본 우리 자신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다. 내 삶과는 무관하다고만 뇌며 세상을 짐짓 외면하고 살아온 젊은이들과 소시민에게 예의 대자보는 정말 안녕하시냐고 물었다. 그 물음은 또 한편으로 젊은이들이 겪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었던 좌절과 고통, 분노를 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에 김수영 시인은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부정한 권력과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자기반성을 통렬하게 노래한 바 있다. 그것은 한편으론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기도 했다.
그는 ‘왕궁’과 ‘왕궁의 음탕 대신에’ 기름 덩어리만 나오는 50원짜리 갈비 앞에서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주인 여자에게 욕을 한다. ‘언론의 자유’와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 대신에 20원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그는 모래만큼, 먼지만큼 작아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나약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이야 60년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권력과 부조리 앞에서 숨죽였던 소시민의 모습은 이 땅의 현대사 길목 길목마다 목격된다. 그들은 우정, 그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누군가가 바로잡을 것이라고 짐짓 변명하고 위로하면서 스스로 작아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라기만 할 일도 아니었다.
민영화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간 철도 노동자를 기다리는 건 직위 해제와 징계와 해고의 칼날이다. 국가 정보기관의 대선 개입과 이를 은폐하기 급급한 권력, 농민들의 삶의 터전에다 고압 송전탑을 세우려는 한전에 맨몸으로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밀양의 어르신들……. 돌아보면 세상은 결코 ‘안녕’하지 않다.
그리하여 예의 대자보는 그렇게 묻는다. 이런 ‘안녕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안녕하시냐’고,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 김수영과 1960년대의 소시민들은 권력과 부자유에 저항하는 대신 설렁탕집 주인과 야경꾼에게 분개하고 그들을 증오하는 걸로 분노를 다스렸다.
그러나 2013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었다. 짐짓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기실 돌아보면 이 땅의 안녕하지 못한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사는 게 바쁘다고, 내 코가 석 자라고, 이웃의 돌아볼 만한 여유 따위는 없다고 짐짓 손사래를 친다.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는 사람들의 그러한 페르소나 뒤에 숨겨진 민낯을 정면으로 겨눈다. 정말 우리는 안녕한가. 이 권력의 독선과 불통 앞에, 자본의 횡포 앞에 벌거벗겨진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과 노동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2. 무관심, 혹은 살인과 배신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작가 부르노 야센스키(Bruno Yasenskii)의 일갈이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신을 배신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친구나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무관심한 자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을 저버리지도, 사람을 죽이지도 않지만’ 이 세상에 살인과 배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침묵, 그 ‘무언의 동의’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에 따라 동의로도, 거부로도 읽힐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부당함과 불의와 모순 앞에서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잘못이라고도, 그래선 안 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동의로 간주된다. 동의로 간주된 침묵은 더 많은 배신과 죽임을 옹호하고 그것을 추인한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퇴행하는 민주주의와 자유 앞에서, 자본의 횡포와 침탈 앞에서 사람들은 오래 침묵해 왔다. 그 침묵의 끝에서 사람들은 다치고, 버려지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안녕’ 대자보는 그 무관심한 대중 앞에, 그 침묵, 무언의 동의를 아프게 환기한 셈이다.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복음 19장 40절)
최근 천주교 사제단과 개신교 목회자들의 시국선언이나 기도회에서 곧잘 인용되곤 하는 성경 구절이다. 그것은 진실 앞에서 침묵해서도, 그 침묵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고 계시다.
3. 영화 <변호인>, 혹은 살아 있는 현실
세밑을 달구고 있는 영화가 있다. 개봉 1주일 만에 누적 관객 300만 명을 가볍게 넘은 영화 <변호인>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그린 이 영화는 마치 ‘안녕’ 대자보가 사람들의 무관심을 향해 던진 안부의 끝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세속적 변호사의 사회적 각성 과정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영화 안팎을 통해서 한 번도 노무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주인공 송우석을 통해서 격정의 정치인 노무현을 추억한다. 제작진들은 의도적으로 노무현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만, 관객들은 그 내밀한 사연을 오늘의 정치 상황의 은유로 읽어낸다.
여느 소시민과 다르지 않은 순진한 현실 인식, 세상은 그리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던 젊은 변호사를 사회적 각성에 이르게 한 것은 이웃의 ‘안녕’하지 못함이다. 그의 안이한 세계관을 뒤집어엎은 것은 폭력과 비상식으로 점철된 권력과 그것이 행사하는 물리적 폭력이었다.
영화 <변호인>은 그 시대적 배경을 1980년대로 명시한다. 형식적으로 그것은 이미 한 세대 이전의 빛바랜 역사다. 그러나 변호사 송우석의 사회적 각성을 따라가면서 관객들은 여전히 익숙한 장면 앞에서 숨을 죽인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시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학생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애국’임을 확신하는 경찰이나 그 재판의 결과를 일찌감치 공유하는 검사나 재판장, 무죄의 증명이 아니라 형량 협상이 자기 일이라고 믿는 ‘관록 있는’ 변호인이 보여주는 것은 1980년대의 현실에 그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한편으로 좌우나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 프레임이 유효한 2013년 현재의 ‘살아 있는 현실’이다.
영화 속의 변호인은 결국 현실에 패배한다. 이어지는 현실의 귀결은 그가 제기했던 상식적 질문에 대해 역설로 답한다. ‘데모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말랑말랑하지 않다’라는 걸 확인하지만, 동시에 강약이 같지 않지만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젊은이의 믿음을 반추한다.
1980년대의 질곡은 불과 몇 년 후인 1987년 6월항쟁으로 그 고단한 투쟁의 매듭을 풀어냈다. 그리고 항쟁을 통해 독재 권력을 무장 해제시킨 것은 권력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무명의 시민들이었다. 때로 모른 척, 못 본 척,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소시민’에서 ‘민중’으로
‘안녕’을 물은 대자보가 겨눈 이들과 그들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김수영의 시대에 설렁탕집 주인에게, 야경꾼에게 옹졸하게 욕하게 분개하던 지질한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바람과 모래와 먼지와 풀 앞에서 ‘나는 얼마큼 작으냐’고 되묻던 비굴하고 겁 많은 소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은 그들을 일러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선생은 말한다. “민족사의 기저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그들의 다른 이름은 ‘민중’이다.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안녕’을 물은 대자보 이후, 파문은 소리 없이 번지고 있다. 이 안부를 통해서 제기된 성찰의 끝은 어디일까. 안녕하지 못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력을 확인하는 게 다일까. 일상과 현실에 대한 성찰로 확인된 안부는 과연 언제쯤 ‘응집’과 ‘증폭’의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인가.
2013. 12.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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