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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중증장애인과 함께한 12년, 그 치유와 성장

by 낮달2018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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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홍은전 지음, 노들의 배움·노들의 투쟁·노들의 일상 <노란 들판의 꿈>

▲ 홍은전, <노란 들판의 꿈> 봄날의책, 2020, 13500 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칼럼 몇 편을 읽고 지은이가 쓴 책을 주문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글 한 편에 드러난 글쓴이의 생각과 세계관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공명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홍은전을 만난 것은 여러 해 전부터 이어져 온 <한겨레>의 칼럼 ‘세상 읽기’를 통해서였다.

 

노들장애인야학의 '실패한 적 없는 기우제' 이야기

 

중증장애인에 관한 글을 주로 썼던 노들장애인야학(아래 ‘노들’) 교사 홍은전의 글을 나는 빼먹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게 그의 삶과 실천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글에는 삶에 관한 얕지 않은 성찰이 담겨 있었고, 그가 담담히 들려주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주었다.

 

언젠가 그가 쓴 책을 읽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 ‘언젠가’가 쉽지 않았다. <노란 들판의 꿈>은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확인한 책 중 공저가 아닌, 그의 단독 저서였다. 최근 ‘홍은전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한겨레>는 그를 ‘작가·인권기록활동가’로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인권기록활동가’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이 그의 삶과 저작 활동을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들의 배움·노들의 투쟁·노들의 일상’이라는 부제를 단 <노란 들판의 꿈>은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이 보고하는 ‘노들의 20년사’다. “노들 사람들이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그래서 실패한 적이 없는 기우제에 관한 이야기”(초판 서문)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차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노들의 보람과 공동체의 비결은 묻는다면 ‘수많은 하루들’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치열한 성찰의 시간”이었다면서.

 

노들이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라는 교훈으로 문을 연 때는 1993년 8월 8일이었다. ‘노란 들판’을 줄인 노들은 농부처럼 우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자는 뜻이었다. 사범대를 나와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홍은전이 노들야학의 문을 두드린 것은 8년 뒤인 2001년 8월이었다.

 

장애인의 ‘장’자도 몰랐지만, 왠지 가면 좋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노들을 찾은 홍은전을 맞은 이는 스무 살 남짓한 남자 교사였다. 그는 야학을 설명하더니 며칠 뒤 집회에 나오라고 했고, 집회의 구호를 묻자 ‘버스를 타자다’라고 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국외자의 이해가 어느 수준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버스를 왜 타죠?”
“장애인은 탈 수 없으니까요.”
“그럼… 지하철 타면 되잖아요.”

▲ 이 시기의 노들야학은 20년 역사 중에서 가장 치열한 갈등 위에 서 있었다. (2001년 모꼬지)

야학이라면, ‘검정고시’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노들은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라는 누명을 쓰고 갇혀 살던 사람들, 집에 홀로 있었을 때는 그것이 ‘문제’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희망을 일구는 실천’의 현장이 되어갔다. ‘야학을 자신의 인생에 묶은 최초의 사람’ 박경석 교장의 주장대로 노들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바꾸는 실천”으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에 어디에도 답이 없었다. 중증장애인과는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지 않는 것’만이 이 사회의 정통한 매뉴얼이었다. 노들은 자신이 가장 잘 쓰는 방법으로 그 답을 찾거나 쟁취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하는 것, 배우는 것, 그리고 싸우는 것이었다.    - 본문 202~203쪽

 

노들의 교실은 중증장애인의 고민과 상처, 분노가 만나고 활성화되는 뜨거운 ‘현장’이 되어갔다. 노들을 거쳐 간 숱한 교사들 또한 “아차산 그 푸른 골짜기와 따사롭고 풍요로웠던 노란 들판에서 치유되고 성장했다.” 장애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시각을 넓혀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고 홍은전은 고백한다.

 

봉사를 꿈꾸며 노들에 왔지만, 사랑과 봉사의 환상은 쉽게 깨어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손잡아 협력하고 살아가는 일은 아무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연대는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에 시작되는 것이었다.

 

노들이 연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권리'

 

1999년 6월 노들의 학생 이규식이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리프트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두 달 뒤 노들은 이규식과 함께 서울시 지하철공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다.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이듬해 5월, 이규식이 승소함으로써 노들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받는 첫 번째 사례를 만드는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노들 소식지 <노들바람>은 “우리에게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썼다.

 

그리고 노들은 ‘비폭력 과격 투쟁’에 들어갔다. 2001년 1월,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참사를 계기로 한 달 뒤, 지하철 1호선 서울역 플랫폼에서 선로 점거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30분간 지하철 운행을 그치게 한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이동권 투쟁’은 이후 지하철 연착 투쟁, 버스 타기 투쟁, 선로 점거, 버스 점거, 도로 점거, 쇠사슬 시위, 단식 농성 등의 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3년 동안 이어진 100만인 서명운동은 2005년 1월, 이동권을 인권의 관점에서 명시하고 저상버스를 의무화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을 끌어냈다. 오늘날 저상버스나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이들 장애인의 투쟁으로 따낸 ‘권리의 증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와중에서도 이동권을 외치며 투쟁한 ‘운동파’와 장애인의 교육권을 가볍게 여겼다고 질책하는 ‘교육파’의 갈등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충돌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지지’, 교육과 운동은 실천 속에 이어졌다. 지은이는 노들이 이 시기에 이루어낸 질적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치열했던 갈등을 견뎌낸 사람들이 온몸을 떨면서 피워낸 꽃”이라고 말한다.

 

2005년 12월, 함안에서 홀로 사는 중증장애인이 얼어 죽는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3월, 활동 보조 서비스의 제도화를 요구하며 서울시청 앞에서 노숙 농성이 시작되었다. 4월 17일에는 서른아홉 명의 중증장애인들이 활동 보조 없이 살아온 저마다의 사연을 목에 걸고 집단 삭발식을 거행했다.

 

서울시가 7천억을 들여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하자 2006년 4월 27일, 중증장애인들은 맨몸으로 한강대교를 건너 노들섬까지 기어가는 투쟁을 벌였다. 돈이 없다며 서울시가 깎으려 한 장애인 활동 보조 서비스 예산은 고작 15억 원이앴다.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장애인들이 온몸을 던져 절규한 이 비장한 투쟁은 결국 서비스의 제도화를 끌어냈다.

▲사람들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버스 점거 농성을 벌였다.

2007년 1월, 복지부가 발표한 활동 보조 서비스 방침은 서비스 시간 최대 80시간, 대상은 소득 수준 차상위 200% 이내였다. 사람들은 다시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단식 23일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소득 기준을 폐지하고 서비스 시간을 180시간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4월에는 활동 보조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2009년 6월에는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라는 구호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이 시작되었고, 두 달 뒤 서울시는 요구를 수용하여 탈시설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설이 아닌 다른 삶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노들이 그 증거”였다.

 

'1'이 되지 못한 '9'의 고백

 

장애인은 열 명 중 한 명(장애인 출현율 10%)이다. 노들의 교사가 되기 전까지 홍은전은 한 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노들의 학생들을 만난 뒤에야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임을 알았다. 12년을 노들과 함께한 지금, 홍은전은 차이는 여전해도 자신이 ‘1’들이 아닐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1’들과 함께 싸우지만 어떤 ‘1’은 포기하는, ‘1’이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안전한 ‘9’”라고 고백한다.

 

홍은전은 노들과 함께한 시간을 통하여 “차별의 백만 가지 얼굴을 보았고, 12년 동안 누군가를 조직한다는 게 결국 스스로를 조직하는 일임을 깨닫고, 그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이 변한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회고한다. 그는 노들이 장애인 운동의 부활에 밑불이 된 이유, ‘대중이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힘의 비밀’을 “노들 야학의 지난하고 지난하고 지난했던 수업과 일상 속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지난(至難)’을 세 차례나 반복한 행간의 의미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평생 같은 자리에 누워 창밖만 바라보았다는 그들과의 연대와 투쟁으로 홍은전은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평생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자신을 멈춰 서게 한 힘은 ‘연민과 분노’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이 벼랑 끝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길을 만드는 것을 본” 뒤에 얻은 깨달음, 존엄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그는 노들의 힘을 ‘치열한 일상성’에 있다고 믿는다. “일상을 만들고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투쟁, 이 작고 사소한 일상”이 자신들의 인생을 끌고 나갔다고 술회한다. 노들의 20년 역사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노들의 전부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에게도 지키고 싶은 삶이 있고, 그것을 다 빼앗긴 존재들에게 필요한 건 적응이 아니라 저항이다.” 당신을 따라 그 말을 함께 외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따라 사느라고 조금 고단했습니다. (……) 평범한 사람들이 이어서 걷고 달리고 굴려서 온 그 20년. 나는 우리의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 본문 296~297쪽

 

나는 이제 마흔을 갓 넘은 이 젊은 작가의 자부심과 긍지를 내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가 담담히 되뇐 숱한 고백과 회고에 젖으며, 노들의 투쟁과 그의 선택 앞에서 자신의 삶이 몹시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가 감내한 십몇 년의 고단하지만 자랑스러웠던 삶의 갈피마다 빛나는 것은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었던 까닭이다.

 

작가는 현재 <한겨레>에 그의 이름을 딴 ‘홍은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새 책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의 출간을 안 것은 <노란 들판의 꿈>을 구매한 다음이었다. 홍은전 인터뷰에서 은유 작가가 말한 대로 “우리 사회가 등 돌린 ‘사람’의 이름을 꽃처럼 불러주다가 스스로 눈물이 되어버리는 홍은전의 열렬한 글쓰기”의 결과인 그의 새 책을 나는 인터넷 서재의 보관함에 옮겨두었다.

 

 

2020. 11. 14. 낮달

 

 

'그냥, 사람' 홍은전에 주목하셨다면 이걸 아셔야 합니다

[서평] 중증장애인과 함께한 12년, 그 치유와 성장... 홍은전 지음 '노란 들판의 꿈'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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