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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까발려진 미국의 빈곤과 계급, 그리고 ‘아메리칸드림’

by 낮달2018 2020.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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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라 스마시 지음 <하틀랜드>

▲ 세라 스마시, <하틀랜드> 반비, 2020

우리는 가난하고, 그리고 여자로 태어났지. 이것만 해도 이 세상에서 우리 몸은 투 스트라이크를 당한 거야. 게다가 엄마는 남자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외모를 가졌고, 나는 원하지 않은 아이였으니, 안 그래도 위험한 세상에서 흔들리던 우리가 각각 원 스트라이크씩을 더 먹었지. 하지만 엄마는 자기가 쓰레기가 아니란 걸 알았어. 자기 딸도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도. - 책 130쪽

 

1977년 9월, 캔자스주 위치토시의 트레일러 주차장 옆 작은 교회에서 마흔다섯 살 난 농부 ‘아니’가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베티와 결혼식을 올렸다. 베티는 나이는 서른둘이지만 여섯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해 온 여자였다. 두 사람의 혼인으로부터 누대에 걸친 세라 스마시(Sarah Smarsh)의, 가난으로 떠도는 가족사가 시작되었다.

 

지은이가 복원하여 태어나지 않은 딸에게 들려주는 가족사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가족의 그것에 그치지 않고 6, 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수십 년간 이어진 빈민들의 고통스러운 일상과 삶의 역사였다. 그것은 흔히들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 불리는 백인 노동 계급의 가난한 삶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사랑에 관한 세밀화였다.

 

세라 스마시는 이 책을 쓰는 데 15년을 썼다. 그는 공공 기록, 오래된 신문, 편지, 사진 등의 기록에서 조각들을 꿰어맞추고, 태어나기 이전 이야기는 가족들의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이 세밀화를 복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태어나지 않은 영혼’ 오거스트에게 구어체의 문장으로 이 오랜 빈곤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오거스트에게 “미국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으로 급선회한 해에 태어”나 자신이 “도달한 삶의 결말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던 자신의 삶에서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말해주기 시작한다.

 

어니와 결혼할 때, 베티가 열여섯에 임신한 지니도 열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지니는 2년 뒤, 열여덟 살에 세라를 낳았다. 세라의 모계에서 그녀의 성장을 도운 여자들 모두 10대에 엄마가 되어 위험한 세상에 아기를 내보낸 것이었다.

 

세라는 “평생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온 여자들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 여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온 순환, 가난의 악순환과 함께 “자기도 어린아이면서 몸 안에 아기를 지니게 되는 운명의 굴레”도 상속했다. 담담히 가난을 증언하지만, 스마시는 그것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을 물려받은 지은이 세라 스마시의 성장기가 숱한 곡절로 얼룩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베티가 딸을 데리고 60번도 넘게 이사하는 바람에 지니는 고등학교 때 48번이나 옮겨 다녔다. 지니의 딸 세라도 고등학교를 옮기기 전까지 캔자스의 두 카운티 안에서 21번이나 이사해야 했다.

 

가난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던 할머니와 어머니와 달리 세라 스마시는 자신의 삶을 “평등의 약속을 기반으로 세워진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아이로 살아가기”로 정의했다. 그는 어렸지만, 모계로 유전해 온 악순환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는 결심을 키워갔다.

 

늘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애썼던 세라는 어린 시절에 가난이라는 악몽, 심리적 위험뿐 아니라 죽음의 위험도 함께하는 현실 가운데 깨어 있어야 했다. 그가 10대 임신을 원하지 않은 것은 도덕적 수치감도 있었지만, 아이를 갖게 되면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에 장애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은 가난한 아이에게 엇나가지 않고 올바로 사는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해준다고 고백하는 세라는 “임신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됐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상상의 딸을 그는 외할아버지 아니의 가운데 이름인 ‘오거스트(August)’로 불렀다. 오거스트는 ‘밝은 빛 같은 존재’이며 유머와 관대함을 타고난, 베티의 일곱 번째 남편이 됨으로써 외할아버지가 된 아니의 이름이었고, 그녀 자신이 태어난 달이기도 했다.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해야 할 때 세라는 자신에게 답을 구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 마음속의 딸 오거스트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내 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였다. 그는 그렇게 구한 답으로 청소년기의 “분노와 자기 파괴의 충동에 빠지기 직전”에 자기 삶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오거스트는 “불확실한 세상보다 더 고요한 존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 최근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조앤 쇼런스틴 펠로우 교수로 임명된 지은이 세라 스마시.

세라 스마시는 자라면서 노동 계급의 삶과 소득 불평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에 이르고 백인 노동 계급은 “인종적 특권과 경제적 불리함의 경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세계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미국의 계급제도는 그 존재를 부인해 왔다는 것, 아메리칸드림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여긴 것은 그래서였다.

 

미국 계급제도가 존재를 부인해 온 부와 소득의 불평등

 

자신이 속한 계급이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서 수치심이 생긴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는 경멸은 미국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수천 명의 가난한 백인 여성이 우생학 프로그램에 따라 징벌적으로 불임 시술을 받고, 1960년대에 싱글 맘들이 세금을 축내지 못하도록 불시에 사회복지사들이 이들 가정을 뒤지곤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복지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만큼 굳건한 자존심으로 버틴 사람들이었다.

 

쉴 새 없이 이사하고 결혼과 이혼을 거듭한 결과, 싱글 맘과 그 딸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세라 앞에 펼쳐진 삶은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쉬지 않고 일해서 스스로 경제 기반을 닦으려고 애쓰거나,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고 저임금 노동자가 되는 나머지 길. 그는 자신의 “모계에서 이어진 악순환의 고리”가 자신의 목표에 적대적 장애라고 생각하자, 그걸 “운명이 아니라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경제적 빈곤과 궁핍은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안 것이 자기 삶의 최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어릴 적에 마음먹은 자신의 목표, 가족이 자신에게 물려준 고통스러운 고리를 끊기 전에는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목표를 이뤄냈다.

 

세라는 엄마 지니가 벗어나지 못한 가족의 굴레, 즉 중독, 10대 임신, 학업 중단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다정한 아빠의 존재였다고 회고한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집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삶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으로, 어려운 순간마다 “내 딸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길 바라?”라고 묻고 그 답을 따르며 살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마침내 고리를 끊어내고 집안 최초로 대학에 진학했고,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일별할 뿐, 그것이 자신의 성공과 승리의 결과라고 치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모계와 사랑으로 자신의 성장을 지켜봐 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존경의 마음으로 돌아본다.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는 불안정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랐지만, 그는 모계의 여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보다 더 깊고 교회의 가르침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신의 직관을 확신”하고 “삶에서 오는 고통을 그토록 오래 감내하면서도 망가지지 않을 수 있다면 ‘힘’이라고 불리는 걸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의 딸 오거스트에게 그게 “진짜”였고, “계급의 축복”이라고 술회한다.

▲&nbsp;대공황을 배경으로 가난한 소작인 가족의 궁핍과 절망을 그리고 있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화한&nbsp;<분노의 포도>

그녀는 40년 묵은 언덕 위의 집을 헐값에 샀지만, 목수 아버지의 도움으로 수리하여 매우 아름답고 모두가 탐내는 집으로 바꾸어놓았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그는 갑자기 방 안에서 오거스트의 존재를 느꼈고 그가 왜 나타났는지를 이내 깨닫는다.

 

오거스트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오거스트는 “그의 것이 되지 않은 가난한 아이”였고, 자신이 더는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오거스트를 가질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성공하면서 얻은 상실 때문에” 그녀는 울었다. 그리고 비로소 오거스트가 “딸이 아니고 고양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힘든 삶에서도 유머와 존엄을 잃지 않은 가족에게 바치는 ‘통찰의 회고록’

 

캔자스의 시골을 무대로 이루어진 일가의 삶과 역사를 돌아보며 지은이는 ‘핵심 지역, 심장 지대’라는 뜻의 ‘하틀랜드(heartland)’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과거와 고향을 사랑으로 복권한다. 책 뒤 ‘감사의 글’에서 지은이는 “가장 깊은 존경심은 힘든 삶을 유머와 존엄을 잃지 않고 버텨내 준 가족에게” 바친다. 세라 스마시는 18살에 자신을 낳았지만, 술 취해 있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자기 엄마 지니에게 자신의 첫 책인 <하틀랜드>를 헌정한다.

 

모계로 순환된 10대 임신과 출산, 떠돌이 생활, 중독의 고리를 끊어내는 성장을 미시적으로 기록하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정과 긍정을 한순간도 숨기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딸 오거스트에게 건네는 고백과 술회의 형식 속에 녹아 있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라 그 성장의 갈피마다 빛나던 사랑과 유머다.

 

나는 보나 마나 온갖 종류의 가난을 네게 물려주었겠지. 하지만 어느 깊은 밤, 직접 기른 양식으로 잘 먹은 너를 트랙터 뒤 썰매에 태우고 별이 가득한 맑은 밤하늘을 달렸을 수도 있겠지. 그 웃음, 그 자유, 그런 행복도 너는 물려받았을 거야. - 책 151쪽

 

이 책이 단순한 가난의 연대기거나, 빈곤 백인 여성의 신분 상승기, 이른바 ‘성공담’이 아니라, “명료한 통찰이 가득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회고록”(뉴욕 타임스 서평)이 된 것은 전적으로 서사의 장면마다 놓치지 않는 ‘미국의 계급과 빈곤’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지은이는 책 끝부분에서 “다른 경계나 범주처럼 허구적 구성물”이지만 “실제적 영향을 미치는 허상”이라고 계급을 규정한다.

 

지은이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들 삶에 명멸한 기쁨과 슬픔, 분노와 희망은 들을수록 조금씩 공감의 부피를 키워가다가 마침내 독자의 마음속에서 선연한 감명과 그윽한 성찰로 확산한다. 그것이 이 작품을 감상적 회고록에 그치지 않고 계급과 빈곤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로 다가오게 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2020. 10. 10. 낮달

 

 

'태어나지 않은 딸'에게 들려주는 가족사, 왜 그랬냐면

[서평] 부의 상징 미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삶, 세라 스마시 지음 '하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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