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문학 시간에 안도현을 가르치면서
방학식 다음 날부터 시작된 보충수업, 어제는 언어영역 문학 문제집에서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배웠다. 같은 쪽에 실린 고은의 ‘머슴 대길이’와 고정희의 ‘우리 동네 구자명 씨’도 같이 배웠다. 새삼스레 ‘가르쳤다’고 하지 않고 ‘배웠다’로 쓰는 까닭은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나는 스스로 배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기 위한 이 나라 문학 공부는 거기가 거기다. 정형화된 의미와 상징, 주제로 깡총하게 정리된 시를 가르치고 배우는 문학 교실. 어떤 가외의 해석과 의미도 용납하지 않는 교실에서 노래는 화석이 된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거부한 것도 그런 우려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읽는 것만으로 그 뜻을 새기기가 만만찮은 현대시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는 측면도 있다. 그것은 어떤 텍스트를 읽고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이미 검증된(?) 수용의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헤매거나 더듬지 않고 시로 난 작은 길을 찾게 해 주는 친절한 안내자인 것이다.
내 서가에는 그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두 권이나 꽂혀 있다.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의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언제인가 밝혔듯 그는 내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다. 그의 시를 좋아했던 나는 그가 첫 시집을 내자, 이내 그의 시집을 샀다. 나머지 한 권은 뒤에 전교조에 참여해 동료 해직 교사로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보내준 자신의 첫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은 어느덧 우리 시단의 중견으로 성장한 듯싶다. 1994년 복직했던 그는 이내 전업 시인의 길을 택해 왕성하게 책을 쓰더니 몇 해 전부터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함께 받는 많지 않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 고등학교의 18종 문학 교과서에는 ‘너에게 묻는다’, ‘연탄 한 장’, ‘모닥불’, ‘사랑’, ‘우리가 눈발이라면’ 등 그의 시 다섯 편이 실렸다. 글쎄, 교과서 수록 시편으로 가늠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이상의 시가 네 편, 정희성·정현종·정호승·송수권·김용택 등의 시가 고작 한두 편에서 서너 편에 불과한 것에 비기면 다섯 편의 무게는 남다르다. 다섯 편이 실린 시인으로 육사를 비롯하여 고은·박재삼·신경림 시인이 있으니 말이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사진에서 시상을 얻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원래 신춘문예 당선작이란 수천 편 가운데서 뽑힌 작품이니 그 완성도야 이를 일이 따로 없긴 하다. 그러나 여섯 학급을 돌면서(여섯 번이나 같은 수업을 하면서) 나는 시간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느낌과 깨달음을 즐겼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면서 나는 이 26년 전에 쓰인 시를 오래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젊은 시인과 혁명가의 ‘만남’
스물셋의 젊은 시인은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한 세기를 건너 19세기 말(1894)의 한 혁명가를 만난다. 1세기 전의 혁명가가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을 매개로 이루어진 이 젊은 시인과 혁명가의 만남은 ‘우리 봉준이’, ‘봉준이 이 사람아’에서와 같이 시간을 뛰어넘는 ‘정신적 교감’으로 승화된다.
여섯 연의 길지 않은 시편 속에서 민중들은 ‘풀잎’, ‘들꽃’, ‘뿌리’, ‘풀뿌리’, ‘푸른 기상나팔’ 등으로 비유되면서 역사와 만난다. 비록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지만, 전봉준을 떠나보내며 ‘울어주지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지만 이 풀뿌리들은 봄이 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 불어제낄 것’이다.
늘 지배계층의 압제에 시달리던 민초들은 권력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지만, 역사의 요긴한 길목에서는 그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그 물줄기를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세기 이전, 고부에서 타오른 불길을 이끈 동학군 장수와 그를 보내야 했던 민초의 아픔과 사랑을 오늘의 것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시는 갑오년 만경들에서 시작된 무지렁이 백성들이 내지르는 저항의 함성, ‘척왜척화(斥倭斥和)’가 얼음 풀린 동진강 어귀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로 전이되면서 마무리된다. 그것이 20세기 젊은 시인이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 90년 전 갑오농민전쟁을 이끈 동학 장수를 만나고 보듬는 방식이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는 안도현의 초기 시 57편이 묶였다. 25년 전에 나온 시집이라는 걸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들 시편에는 20대 초반 애송이 시인의 풋풋한 감성이 오롯이 묻어난다. 글쎄, 순전히 취향이겠지만,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보다는 이 시집 속에 담긴 서정적인 시편들이 내겐 훨씬 더 친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하나 더 붙이는 시는 1981년 대구의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낙동강’이다. 안도현은 경북 예천 출신인데 전라도에 가서 대학을 다녔고 지금도 거기 살고 있다. 그의 첫 당선작은 경북 내륙의 낙동강을 노래했지만, 두 번째 작품은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다루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이태 전에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를 펴내기도 했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이 책은 10대 소년 시절부터 시를 공부해 온 시인이 쓴 시작법이다. 나는 아이들이 써 대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요령부득의 시를 볼 때마다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정작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야 하는 자신조차도 시를 자주 읽지 않으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도 아니다. 아이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시를 낭송하면서 공부할 것을 주문한다. 여유가 되면 시를 필사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추천한다. 시가 시인의 서정의 산물이라면 그걸 느끼는 데는 공감을 위한 준비로써 낮은 목소리로 시인의 내밀한 감정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도 썩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서다.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누군가 노래(미완성)로 만들었나 보다.(유종화 곡, 오창규 노래) 인터넷에서 노래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듣는 느낌은 좀 각별하다. 노래를 들으면서 눈 내리는 만경들에 떠가는 ‘해진 짚신 상투 하나’의 실루엣을 떠올려 본다.
2011. 1.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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