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 기르기에 입문하다
주변에 꽃을 가꾸는 이가 있으면 저절로 그 향을 그윽하게 누릴 수 있다며 ‘근화자향(近花者香)’ 운운한 게 지난 8월 말께다. 올해 학년을 같이 맡은 동료 여교사가 조그마한 화분마다 꽃을 길러서 창문 쪽 베란다 담 위에 죽 늘어놓았다는 얘기도 곁들였었다.
그저 꽃을 기르는 취미가 있나 보다, 하고 심상하게 바라보기만 했는데 웬걸, 이 이는 ‘화초 기르기’의 고수다. 추석을 쇠고서는 내게 멋진 화분에 든 고무나무를 분양해 주더니, 며칠 전에는 제라늄 한 포기를 건네주었다. 집에다 가져갔더니 아내와 딸애가 반색했다.
고무나무도 그렇고 제라늄도 처음이다. 고무나무는 두껍고 윤이 나는 대여섯 장의 잎이 보여주는 단순함과 무게감이 마음에 찬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 화초가 주는 묘미는 그 단순하고 명쾌한 모양새에서 느껴지는 균제미(均齊美)가 아닐까 생각한다.
제라늄은 작은 풀꽃이다. 대도 가늘고 꽃의 크기도 그렇고 대체로 연약한 느낌이다. 망울 맺은 꽃봉오리는 살구색인데, 그 생김새가 아주 묘해서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종의 어지럼을 불러일으킨다. 사발형의 옹기화분에 담긴 녀석의 자태에서는 담담하면서 만만치 않은 기품이 우러난다.
나이 들면서 저마다 하나씩 취미를 가꾸며 사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 어떤 이는 난을 기르고 또 어떤 이는 수석(壽石)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아직 나는 아무 데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그나마 몇 해 전부터 텃밭을 가꾸는 데 마음을 쓰긴 했지만, 화초를 기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화초란 말 그대로 완상을 위한 것이다. 굳이 그렇게 마음먹는 것은 아니면서도 어쩐지 그게 한갓진 호사 취미 같아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였다. 뭐랄까, 유기농의 방향을 인정하면서도 삶이 고단한 이들에게는 그게 일종의 사치라는 생각을 거두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텃밭에 심은 채소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나 베란다에 공들여 기르는 화초에 마음을 붙이는 게 다르지 않다는 걸 요즘에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두 행위를 가로지르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눈길,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서다.
진딧물이 끼거나 잎마름병으로 시들시들 곯고 있는 고추를 바라보는 마음에 서린 안타까움이나 까닭을 알 수 없게 시들고 있는 화초를 지켜보는 마음이나 그 근본이 다르지 않을 터이다. 세월이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네 시선에 서린 까칠함을 닳아지게 했던가. 어느 날,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을 눈여겨보는 우리의 눈길은 시방 어버이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
집에 가져다 놓은 제라늄이 꽃을 피웠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빛깔을 내는 꽃잎의 얇은 질감이 손에 닿을 듯 느껴지면서 그것은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하고 릴케는 묻는다. 하얀 국화, 그 짙은 화사함으로 오는 사랑. 시월은 제라늄 향기와 함께 시방 깊어간다.
2008. 10.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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