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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길 뻔했던 문화재들, 이리 보니 반갑네

by 낮달2018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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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유적 어우러진 충북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 충북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서 있는 ‘청풍명월’비.  충주댐 수몰 문화재를 모아놓은 곳이다 .

수몰(水沒)의 역사는 근대화, 정확히 말하면 댐 건설의 역사와 겹친다. 자연적 지형의 변화로 한 마을이 깡그리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댐 건설은 당연히 인공의 호수를 만들어낸다. 이 인공호는 그 발치에 누대에 걸친 지역 공동체를 수장시켜 버린다.

 

수몰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낯선 땅으로 쫓아냈다. 이른바 ‘수몰 실향민’이다. 분단으로 고향 잃은 사람들 대신 근대화와 개발은 물에 잠긴 고향을 둔, 전혀 다른 실향민을 양산했다. 그들은 물에 잠긴 집을 떠나 호수 주변의 인근 마을에 새로 뿌리를 내리거나 고향을 등지고 도회로 떠났다.

 

‘발 달린 사람’은 간단히 물에 잠긴 옛터를 떠나지만, 문제는 발 없는 고가 등의 문화재다. 이들은 여느 집이나 논밭처럼 수몰되도록 버려둘 수는 없다. 수몰로부터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부재별로 해체하여 인근의 안전지대에 복원하는 길밖에 없다.

 

이 해체와 복원은 새로 짓는 것에 비겨 두서너 배의 경비가 드는 일이다. 그러나 어쩌랴. 옛 선인들의 삶과 문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구하는 일이란 호수를 만들고 댐을 조성하는 일만큼이나 종요로운 일임을.

▲ 청풍호는 1985년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충주호의 일부다.

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들 수몰 지역 문화재들을 한데 모아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안동호와 임하호 덕분에 조성된 안동 군자리 마을이나 지례 예술촌 같은 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마을들은 모두 70, 80년대에 건설된 댐으로 인한 수몰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몰’이 만들어 낸 공간, 청풍문화재단지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10여 년 만에 들른 충북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도 그런 마을 가운데 하나다. 이 단지는 1985년 충주댐의 완공으로 수몰된 청풍면 지역의 문화재들을 물태리 인근 망월산 자락에 옮겨 조성했다.

 

망월산 자락에 앉은 단지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마을인데도 그리 인공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단지가 자리한 망월산 오른편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청풍호 덕인지도 모른다. 단지 안에 옮겨진 수몰된 청풍면 일대의 고가와 유적들은 마치 제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본래 청풍부(淸風府) 서쪽의 관문이었던 팔영루(八詠樓)는 단지의 정문 구실을 하고 있다. 누 앞에 선 수직(守直) 군사 마네킹이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그게 이 충청도 시골 지방의 정서이자 디스플레이(?)라고 봐주면 된다.

 

팔영루를 지나 나지막한 경사를 오르면 황석리·도화리·후산리·지곡리 등 모두 네 채의 고가가 줄지어 나타난다. 모두 수몰된 청풍에 있던 고가들로 전형적인 조선 말기의 목조 건물들이다. 예사 사람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이겠지만 이 집들은 중부내륙권의 가옥 구조를 그대로 보여 주는 유적들이다.

▲ 댐 수몰 지역에서 옮겨온 고가와 생활 유품들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집 안팎에 전시된 생활 유품 1600여 점이다. ‘전시’라고 하지만 따로 모양을 내서 보이는 게 아니라 집 안팎에 세간살이로 자리 잡고 있다. 둥구미와 맷방석, 도롱이와 주루막에서부터 오줌장군과 길마, 멍에와 가마니틀까지 없는 게 없다. 말로만 듣던 벼훑이와 쇄기까지 고루 갖추었다.

 

고가 안팎에 전시된 생활 유품들

 

그것들은 마치 이 고가에 살던 옛사람들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무연히 이 21세기의 관광객을 맞고 있다. 그런 오래된 물건 앞에서 그나마 머무는 이들은 저 농촌의 삶에 대한 기억이 있는 중장년층이다. 아내와 나는 후산리 고가 대문간 옆 담 위에 얹힌 길마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길마를 담 위에 얹어 놨네.”
“길마?”
“질매를 표준말로 길마라고 하지.”

 

그러는데 아득한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배웠던 말 잇기 노래가 떠올랐다. 내 고향 경북 칠곡에서 구전되는 노래다.

 

저 건너 영감 나무하러 가세 / 등 굽어 못 가네 / 등 굽으면 질매가지 / 질매가지는 네 구멍이니 / 네 구멍은 동시리 / 동시리는 검으니 / 검으면 까마귀 / 까마귀는 너푸니 / 너푸면 무당 / 무당은 두드리니 / 두드리면 대정 / 대정은 찝으니 / 찝으면 게 / 게는 구멍에 드니 / 구멍에 들면 뱀 / 뱀은 무니 / 무는 것은 범 / 범은 뛰니 / 뛰면 벼룩 / 벼룩은 붉으니 / 붉으면 대추 / 대추는 다니 / 달면 엿 / 엿은 붙으니 / 붙으면 첩!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일꾼 둘을 데리고 방앗간을 운영할 때 우리 집 황소는 저런 길마를 얹고 대형 타이어를 단 달구지를 끌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이제 달구지는 사라지고 경운기와 트랙터가 짐을 싣고 나르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멎은 시간의 흔적 앞에서 얼마간 더 머물렀다.

 

옛 민가를 돌아가면 널따란 잔디밭에 고인돌과 각종 비석이 일렬횡대로 서 있다. 수몰 이전 옛 청풍, 수산, 덕산, 한수 지역에 흩어져 있던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도호부 시대 수령의 송덕비, 공덕비, 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공적비 10점을 모아놓은 이른바 ‘석물군(石物群)’이다.

▲ 수몰 이전 옛 청풍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령의 송덕비, 공덕비, 선정비 등을 모아놓은 석물군.
▲ 고려 때 청풍현 관아 부속건물인 한벽루(위)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인 금병헌.

짙푸른 하늘 아래, 푸른 잔디밭에 짧게 그림자를 드리운 석물의 행렬은 좀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비석들 앞에는 남방식 고인돌 5기가 나무 울타리 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가운데 고인돌에는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마모가 심하지만, 북두칠성과 북극성만은 선명해 보인다.

 

석물군을 지나면 세 채의 건물이 청풍호를 등지고 있다. 맨 왼편의 것이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인 금병헌(錦屛軒,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이다.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시방 동헌에서는 마네킹 부사가 죄인을 묶어놓고 징계하고 있다. 머리를 조아린 아전과 죄인 앞에 있는 시간도 정지해 있다.

 

가운데 건물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응청각(凝淸閣)이고 오른쪽 건물은 보물 제528호 한벽루(寒碧樓)다. 고려 충숙왕 때(1317)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누각의 아래 기둥은 이른바 엔타시스 수법의 ‘배흘림’ 기둥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 팔작집은 그 높이가 만만찮은데다가 누각 오른쪽에 붙인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 때문에 그 규모가 다소 위압적이다. 익랑도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적잖은 규모이다.

▲ 망월 산성은 망월산(336m) 봉우리의 꼭대기를 깎고 둘레에 성벽을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

금병헌 옆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망월산 정상에는 망월 산성이 새로이 조성되어 있다. 이 성은 지방기념 제93호로 지정된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망월산(336m) 봉우리의 꼭대기를 깎고 둘레에 성벽을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최근 복원했고 둘레 495m의 소규모인데도 성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성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 덕분인 듯하다.

 

산성의 꼭대기 망월루에 오르면 눈 아래 펼쳐지는 청풍호와 주변 풍경이 좋다. 낮고 편안한 산의 행렬이 들쑥날쑥한 호숫가를 잇고 있다. 낮은 산을 거느리고 펼쳐진 호수의 수면은 ‘십 리 빙환(氷紈, 얼음같이 희고 깨끗한 비단)을 다리고 고쳐 다려’(송강 정철 <관동별곡>) 놓았다는 경포에 비길 만하다.

 

망월에서 내려다보면 문화재단지와 단지 아래쪽의 SBS 드라마 <장길산>과 <일지매> 촬영장 세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촬영장 세트는 원래 기대할 게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길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껍데기만 만들어 놓은 마을이 어디 가겠는가.

 

국화꽃 향기와 전통문화 공연

 

성으로 오르는 길은 물론, 단지 곳곳은 시방 피는 국화로 노랗다. 올해 내내 심었다는 12만 포기의 국화다. 아직은 봉오릴 맺고 있는 국화는 곧 만개할 것이다. 매표소에서 나누어주는 단지 소개 전단에 쓰인 ‘국화꽃 향기’의 뜻이 비로소 새겨진다.

▲ 단지 안에는 올해 내내 모두 12만 포기의 국화를 심었다고 한다.  국화는 이번 주말에 절정이 될 듯하다 .
▲ 매 주말 전통문화 공연 가운데 하나인 합동 연주회. 청중은 많지 않았지만, 현악의 선율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
▲  제천 채임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현악사중주

정작 청풍문화재단지에서의 백미는 한벽루 앞에서 펼쳐진 현악 4중주 연주회였다. 우리는 처음에 거기서 별도의 행사가 있는 줄 알았다. 더블베이스 주자 한 명만 남자였고, 비올라와 바이올린 주자는 여성이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연주회를 감상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연주자들의 주위를 돌면서 사진만 찍어댔다. 연주자 외에는 음향 시설을 살피는 청년 한 사람이 다였다. 연주회의 연유를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한 이십여 분 연주가 끝나고 휴식 시간에 나는 더블베이스 주자를 붙들고 물었다.

 

“이 연주회는 누가 여는 건가요? 문화재단지인가요?”
“그런 걸로 압니다.”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신사가 끼어들었다.

 

“이분들은 제천 채임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십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이가 제천시 관광 시설관리소장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청풍문화재단지 안에서 9월부터 전통문화 공연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번 현악 사중주도 그 일부라고 말했다. 확인해보니 주말마다 문화재단지 안에서 베풀어졌던 공연은 전통민요, 소리, 파대 놀이, 학춤, 각설이 등 다양했다.

 

이번 주말과 다음 주말 공연은 ‘전통민요’ 마당

 

제천 채임버 오케스트라 단원이 참여한 이 현악 사중주는, 그러니까 주로 전통문화 공연으로 이루어진 일정 가운데 양념인 셈이다. 이제 공연은 10월 3, 4주 주말분만 남았다. 야생화 무대(10월 23일과 30일)와 한벽루 마당(10월 24일과 31일)에서 펼쳐질 마지막 무대는 제천국악협회가 공연하는 ‘전통민요’다.

 

10월의 호숫가 산등성이에 복원한 수백 년 묵은 누각 앞에서 듣는 현악기의 선율은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음 회 연주도 듣고 가자는 아내를 채근해 길을 나서면서 나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들었던 가야금 산조 가락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이번 주말과 다음 주말에 야생화 무대와 한벽루 마당에서 펼쳐질 ‘전통민요’ 공연은 청풍문화재단지로 가을을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값지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사람이 문화를 찾는 형식이 아니라 문화가 사람을 찾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2010. 10. 20. 낮달

 

 

물에 잠길 뻔했던 문화재들, 이리 보니 반갑네

음악과 유적 어우러진 충북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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