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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풍경

[사진]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누가 주연일까

by 낮달2018 2020.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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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감문면 배시내의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단지

▲ 김천시 배시내 지나 빗내들에 조성된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밭.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언제나 사실이다. 장천 코스모스 축제를 다녀오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열리는 코스모스 축제를 주워섬겼지만 정작 인근에서 베풀어진 행사는 모르고 지나갔길래 하는 말이다.

 

지난 일요일은 방송고 등교일, 정기고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아침에 교무실에 들른 우리 반 여학생(소녀가 아니라 50대 아주머니다.)이 스마트폰으로 잔뜩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인근에 있다는 해바라기 밭을 소개해 주었다.

 

“한번 가보세요. 아주 대단해요.”

“거기가 어디요?”

“김천 감문인데요. 배시내라고 아세요?”

“배시내?”

“배시내 지나 개령 가는 길에 있는 빗내들이라는 곳인데요…….”

“빗내? 아, ‘빗내농악’의 그 빗내?”

 

삼한시대에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에서는 나라 제사와 함께 풍년을 비는 별신제(別神祭)를 지냈는데, 이는 동제(洞祭) 형태로 전승되었다. 매년 동제 때는 풍물놀이와 무당의 굿놀이, 줄다리기 등의 행사를 벌였는데 이들 행사가 혼합되어 진굿 형식의 풍물놀이로 발전한 게 ‘빗내 농악’이다. [관련 글 : 김천 빗내농악의 한판 풍물굿]

▲ '배시내'는 낙동강에서 감천으로 이어지는 물길 따라 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안동 대보름 축제에 참여한 경북 무형문화재 제8호 빗내 농악. 2009년 2월 안동.

22년 만에 복권된 한글날 공휴일, 11시가 넘어서 집을 나섰는데 애걔, 불과 20여 분 만에 현장에 닿았다. 알고 보니 ‘배시내’는 김천시 감문면 태촌3리에 속하는 자연마을의 이름이다. 배시내는 낙동강에서 감천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생필품을 실은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배가 드나드는 시내’란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김해 김씨·함안 조씨·안동 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에는 우회 도로가 나기 전, 옛 도로를 중심으로 40여 년 전까지 3일과 8일에 제법 큰 규모의 오일장이 섰다. 특히 우시장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큰 황소가 가장 많이 거래되는 쇠전으로 유명하였다.

 

배시내, 1862년 개령민란의 고장

 

배시내는 140여 년 전인 1862년에 일어난 개령민란의 고장이기도 하다. 개령민란은 조선 후기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항쟁의 하나로, 철종 13년 개령 현감 김후근과 향리들의 폭정에 항거해 현민들이 배시내 장터에 모여 봉기한 사건이다.

 

개령민란의 특징은 향반(鄕班)인 김규진이 주도했고, 이방도 농민 편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거사 계획이 누설되어 김규진이 체포되자 이튿날 현민 수천 명이 김규진의 석방을 요구하고 관청을 점령하여 군정·전정·환곡의 장부를 불사르고, 향리 5명을 살해했다.

 

정부는 현감을 파면하고 향리를 처벌하는 한편, 주동자를 철저히 처벌함으로써 농민항쟁을 수습했다. 김규진 이하 4명이 효수되고 나머지 사람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민란이 수습된 후 현감 김후근은 파직되어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건만 지금 배시내 삼거리 주변은 ‘고추장 석쇠불고기’라고 이름표를 내건 밥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고추장을 발라 석쇠에 얹어 연탄불에 구운 이 불고기는 인근에 이름이 높아서 구미 시내에서도 같은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더러 있을 정도다.

 

배시내에서 개령 가는 길로 500미터쯤 거슬러 오르니 오른쪽으로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이 자리 잡았다. 길 왼편으로 흐르는 물은 우두령과 대덕면 내감리에서 발원해 배시내를 거쳐 선산의 낙동강에 이르는 76Km의 하천 감천이다. 그 감천의 둔치에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해바라기 사이에 울긋불긋 섞인 것은 코스모스였다.

 

‘빗내 코스모스 페스티벌’의 주연은?

 

둔치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세워진 푯말을 보고서야 며칠 전에 이미 이곳에서 축제 한마당이 이미 베풀어졌다는 걸 알았다. 올해 첫 회인 ‘김천 빗내 코스모스 페스티벌’은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닷새 동안 치러졌다. ‘빗내들 코스모스와 함께하는 가을 음악회’와 ‘코스모스 시티 투어’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던가 보았다.

 

행사장인 해바라기 밭을 둘러보면서 왜 ‘해바라기’가 아니라 ‘코스모스’가 주인공이 되었는지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나 지금은 10월이고 가을이다. 유명한 ‘태백 해바라기 축제’는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리는 행사니, 지금 뜬금없이 ‘해바라기’를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해가 떠 있어도 고개를 15도쯤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 사이에 코스모스는 점점이 떠 있었다. 장천면의 그것에는 비길 수 없는 수준의 군락이 띄엄띄엄 펼쳐진 빗내의 코스모스는 여느 꽃들과는 많이 달랐다. 잎 가장자리에 짙은 윤곽선이 나 있어서 다소 야단스러워 보이는 데다가 빛깔도 연분홍보다 짙었고 꽃잎도 다소 컸다.

 

비켜 간 태풍 탓이었을까. 하천 주변의 공기는 탁하고 무더웠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다가 밭 가운데 세워진 원두막에 올라서 잠깐 쉬기도 했다. 원두막 위에는 어김없이 늙은 호박이 한 덩이씩 얹혀 있었고. 연출인가 했더니 말라 죽은 줄기가 보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축제를 소개한 지역 신문 기사에 따르면 감천의 해바라기 밭은 4만6천 평에 이른다고 했으나 내 눈의 가늠으로는 그걸 확인할 수 없다. 기사를 살피다가 빗내의 행정 명칭이 ‘빛 광(光)’이 아닌 ‘넓을 광(廣)’자 ‘광천(廣川)’인 걸 보고 다시 머리를 갸웃거렸다.

 

‘빗내’가 ‘빛내’가 아니란 말인가. 김천시의 지명유래를 찾아보고서야 내가 내 짐작이 빗나간 걸 알아챘다. 빗내는 ‘감천에 비켜 흐르는 내가 동네 앞으로 흘러서 붙였다’는 설과 ‘동네가 감천에 비스듬히 있어서’ ‘빗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는 모양이다.

 

엔간히 사진을 찍었다 싶어 차를 돌려 도로에 올라서자, 펼쳐지는 들은 한 주일 전보단 훨씬 노란빛이 짙어졌다. 잠깐 온도가 높아졌을 뿐이지, 지금은 가을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익어가는 곡식과 과일들과 함께 시나브로 시간은 이미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2013. 10.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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