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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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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비’와 ‘덴푸라’

by 낮달2018 2020.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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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어 찌꺼기

 

1. ‘고추냉이’와 ‘와사비’

 

‘고추냉이’라고 하면 잠깐 헷갈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와사비(わさび/山葵/和佐比)’라 하면 이내 머리를 주억거릴 것이다. 그렇다. 주로 일본 요리에서 뿌리를 갈아서 양념으로 쓰는 고추냉이는 ‘와사비’라는 일본말로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와사비’는 ‘사시미’라고 불리는 ‘회’를 먹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인 까닭이다.

 

매운맛으로 치면 고추냉이는 겨자와 비슷하다. 뿌리를 간 매운맛은 겨자와 비슷하지만,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과는 다르다. 고추냉이는 혀를 자극하기보다는 증기가 코를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를 먹을 때 간장에 좀 과하게 고추냉이를 풀면 눈물이 쑥 둘러 빠지는 느낌을 겪은 사람은 안다.

▲ 일본에서 재배하는 고추냉이. 우리나라에선 울릉도 등에서 재배한다.

고추냉이는 우리의 전통 식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걸 횟집에서나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공식적으로 ‘와사비’를 우리말 ‘고추냉이’로 순화한 것은 1995년이다. 문화체육부에서 ‘일본어 투 생활용어 순화 자료’ 702 단어를 고시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상에서 고추냉이보다는 ‘와사비’로 통하는 게 현실이다.

 

명색이 국어를 가르치며 사는지라 나는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쓰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당연히 횟집에 가서도 ‘와사비’ 대신 ‘고추냉이’를 쓴다. ‘고추냉이’를 못 알아듣는 횟집 종업원은 없다. 그런데도 대체로 사람들은 아주 편하게 ‘와사비’를 쓴다.

 

튜브에 넣어서 파는 고추냉이도 상품 이름은 ‘와사비’로 붙인다. 국내에서 튜브에 넣은 고추냉이를 판매하는 회사는 두 군데데, 모두 상품의 이름을 ‘와사비’로 붙였다. 한 회사의 제품에는 작은 글씨로 ‘고추냉이’를 써넣은 게 다를 뿐이다.

▲ 표준국어대사전은 와사비를 '고추냉이'로 풀이하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모두 일본어 와사비(wasabi[山葵])로 쓰고 있다.

글쎄, 모르긴 해도 상품 이름부터 고쳐나가면 ‘고추냉이’는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묵’이라고 순화해 놓아도 굳이 ‘오뎅’이라고 쓰는 이들이 여전한 걸 보면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고추냉이 얘기가 나온 김에 그걸 유용하게 쓸 데 하나 알려 드린다. 횟집에서 구운 꽁치가 나오면 그걸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 먹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 삶은 고기[수육(熟肉)]를 먹을 때 고추냉이 간장을 찍어서 들면 각별한 맛이 있다. 고추냉이의 매운맛은 고기에 남은 냄새를 중화하면서 별미를 선사해 준다. 강추!

 

2. ‘덴푸라’를 모르는 아이들

 

우리 일상에서 일본어 찌꺼기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어른들이다. 요즘 아이들은 뜻밖에 일본어 찌꺼기에서 벗어나 있다. 으레 알리라고 생각한 일본어를 아이들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꽤 오래된 유머로 ‘덴푸라’ 얘기가 있다. 미술 시험시간에 한 아이가 커닝했다. 정답이 ‘로댕’이었는데 아이는 그걸 ‘오뎅’으로 잘못 읽었다. 뒤의 아이는 그대로 베끼려다가 커닝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같은 뜻인 ‘덴푸라’로 적었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해 주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웃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이들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덴푸라’가 뭔데요?”

 

덴푸라[天婦羅, ←テンプラ]는 ‘빵’(pão)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어 ‘tempero’에서 온 말이다. 썩지 않게 보존해 놓은 시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는 ‘미라’도 역시 포르투갈어 ‘mirra’에서 왔다. ‘덴푸라’는 순화해서 ‘튀김’으로 쓴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입에 붙여서 쓰는 일본말 찌꺼기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해방 후 반세기를 넘기면서 세대가 거듭된 결과다. 결국은 윗물은 그대로라도 아랫물은 바뀌었다는 얘기다. 그것은 교육의 힘, 세월의 힘이기도 하다. 맑아져야 할 윗물의 구실이 기대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2012. 10.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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