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취기’, ‘에치기’, ‘에추기’ 등으로 불리는 ‘예초기’, ‘풀깎이’로 쓰면 편할 텐데
바야흐로 벌초 시즌이다. 주말에 주변 산을 찾으면 온 산에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진동한다. 산에서 이제는 땔감을 구하지 않게 되면서 산은 울창한 숲으로 우거졌다. 따로 소를 먹이거나 쇠풀을 뜯는 것도 아니니 수풀도 마찬가지로 무성하다.
예전처럼 낫을 가지고 덤비는 건 무리다. ‘불감당’이라는 뜻이다. 원래 길이었던 곳도 마구 자라난 풀 때문에 구분이 되지 않는다. 부득이 예초기를 마치 낫 휘두르듯 하며 풀을 쳐 내며 길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한두 기가 아니라 십수 기의 산소를 돌봐야 하는 집안에선 예초기는 필수가 되었다.
아마 일본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이 ‘풀 깎는 기계’를 예초기(刈草機)라 한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이를 ‘예취기’로 발음할 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선 제멋대로 모음을 줄여 ‘에치기’, ‘에추기’ 등으로도 부른다. ‘예’자가 흔히 쓰이는 글자가 아닌 ‘벨 예(刈)’자인 탓이다.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말로 바뀌는 경우는 물론 있다. 가정에서 연탄을 쓰던 때의 얘기다. 연탄불이 꺼지면 급하게 불을 살리기 위해 만든 ‘착화탄(着火炭)’이 있었다. 말 그대로 ‘불을 붙이는 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은(경상도 얘기다.) 이를 ‘석가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웬 석가? 처음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어리둥절했을 게다. ‘착화’의 ‘화’가 단모음으로 바뀌어 ‘착하’(아이들이 ‘과자’를 ‘가자’로 부르는 형식도 같다.)가 된 것까지는 설명이 된다. 그러나 ‘착’이 어떻게 ‘석’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자어 ‘삭월세(朔月貰)’가 ‘사글세’로 바뀐 것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흔히 ‘와전(訛傳)’이라고 뭉뚱그리긴 하지만 ‘착화탄→석가탄’의 경우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경운기’를 ‘기공기’라 부르는 노인들이 더러 있다. 이 경우도 설명이 가능한 변화라 볼 수 있으나 ‘석가탄’은 정말 이해불능이다.
예초기를 비슷한 다른 발음으로 부르는 건 그게 대중화되는 과정이 제한적이었고 공급처에서도 ‘예취기’ 등으로 쓴 경우가 있어 그런 것 같다. 물건에 이름이 직접 씌어 있으면 와전의 가능성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제품들 살펴봐도 제 이름을 달고 있는 놈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이’나 ‘-기’ 등의 접미사를 붙여서 명사를 만드는 방법은 매우 생산적이다. 재떨이, 구두닦이, 연필깎이, 쓰레받기 등이 좋은 예다. 더구나 ‘잔디깎이’도 있으니 예초기를 ‘풀깎이’와 같은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그건 물론 언어 대중들의 광범위한 승인이 필요한 일이지만 말이다.
2008. 9. 1. 낮달
12년 전에 쓴 글인데, 아직도 ‘예취기’는 쓰이고 있다. 작물을 수확하는 기계를 ‘취할 취(取)’ 자를 써서 예취기라 하는데, 문제는 단순히 풀 베는 기계도 일부에서는 ‘예취기’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예취기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이다.
예취기(刈取機)는 곡식이나 풀을 베는 기계다. 넓은 의미의 수확기계로 통상 작물 수확용 예취작업기를 총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예취탈곡기로 탈곡, 조제 등의 장치를 갖추지 않은 농업기계이다.
특별히 잔디를 깎는 기계는 잔디깎이라고 부르며, 보통 이 경우는 예초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지방과 지역지에서, 그리고 더러는 전국지에서도 ‘예취기’라고 쓰고 있다는 데 있다. 정작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풀 깎는 기계는 모두 '예초기'로 쓰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음은 2020년도에도 쓰이고 있는 ‘예취기’ 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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