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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입춘’ 지나 설 쇠고 다시 찾은 덕유산 향적봉

by 낮달2018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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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茂朱)와 설천(雪川), 그리고 구천동(九千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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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맑고, 눈이 녹아서 산 아래로 덕유산 자락과 마을이 멀리 내려다보였다. 방향은 분간되지 않았다.
▲ 사진으로만 보던 눈 쌓인 산자락. 눈이 녹으면서 능선마다 일렬로 선 나무가 봉우리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설날 연휴에 아이들이 나들이를 의논한 끝에 덕유산을 골랐다. 지난번 내가 다녀온 덕유산 설경을 기억한 아이들은 덕유산국립공원 누리집에서 실시간 시시티브이(CCTV)로 설천봉을 확인해 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덕유산을 찍었다. 그러나 명절 연휴, 12일은 오전까지 예약이 차서 부득이 오후 2시 반 곤돌라를 예약했다. [관련 글 : 덕유산 향적봉의 눈꽃 행렬, ‘설경의 갈증풀었다]

 

‘구천동’으로 유명한 무주

 

11시쯤 속이 많이 불편한 아내는 못 가겠다고 하여, 셋이 아들애의 승용차로 출발했다. 영상의 기온이라 가는 길은 쾌적했는데, 도계를 넘어 무주군으로 들어서자, 도로 주변의 산과 들에는 잔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역시 무주(茂朱) 쪽은 눈이 잦은 고장이다.

 

무주는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구천동(九千洞)’ 때문에 낯설지 않은 고장이다. 무주에 ‘구’ 씨와 ‘천’ 씨가 많이 살아 구천동이라고 했다는 얘기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그 유래담이 상세하다. 이 유래담의 주요 모티프는 ‘암행어사 박문수’인데, 토착민과 이주민의 갈등에 ‘박문수 설화’가 결합한 형식으로 추정한다.

 

구천동에는 토박이 천씨와 한양에서 피신해 온 구씨가 살았는데, 천씨는 흉포한 사람이었다. 천씨는 구씨의 며느리가 탐나서 ‘구씨 아들이 우리 며느리를 유인해 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구씨 집에서는 너무나 억울해서 다 함께 죽자고 하는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구씨 집을 방문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천(千) 씨는 있지만 구(九) 씨는 존재하지 않는 성씨다. 원래 구천동 계곡은 절이 14개나 있었을 정도로 불교의 세력이 커 당시엔 이곳에서 불도를 닦는 신심 깊은 불자가 9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훨씬 더 그럴싸하다.

 

그러나 나는 구천동을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김환의 이름으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책을 읽은 아들애도 같은 얘기를 했다. 최참판댁 윤씨 부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연곡사에서 남몰래 낳은 핏덩이, 나중에 아비를 따라 구천동에서 자랐대서 ‘구천이’가 된 그 김환 말이다.

▲ 구천동은 나제통문에서 백련사까지 28km에 이르는 빼어난 경치를 33경이라 이름을 붙였다.

구천동의 행정 명칭은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인데, 최근 주소 체계가 바뀌면서 비로소 ‘구천동로’라는 길 이름이 등장했다. 무주군 설천면 덕유산 내의 계곡으로 무주를 대표하는 명소가 구천동이다. 나제통문에서 백련사까지 28km에 이르는 구간에서 빼어난 경치를 찾아 사람들은 ‘33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주는 ‘고을 주(州)’ 자 쓰는 고을 아닌 ‘무풍’과 ‘주계’가 합쳐진 이름

 

무주는 같은 도의 전주(全州)나 완주(完州)처럼 ‘고을 주(州)’ 자를 쓰는 고을이 아니다. 무주는 삼한시대(4세기 이전)에는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동편은 변한, 서편은 마한에 속해 있었다. 삼국 시대(BC 1~667), 변한의 무풍(茂豊, 현재 지명)은 신라에 속하여 무산현(茂山縣)이라 했으며, 마한의 주계(朱溪, 현재 무주읍)는 백제에 속해 적천현(赤川縣)이라 불렀다.

 

그러다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이후에 종전의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적천(赤川)을 단천(丹川)으로 개칭하였다. 고려(918년∼1392년) 건국 이후에는 무풍은 그대로 두고 단천을 주계로 바꾸어 사용했으며, 그 후 조선 태종 14년(1414년)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의 무풍과 백제의 주계를 합병했다. 무주라는 지명은 무풍과 주계가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면서 비로소 사용하게 된 것으로, 두 고을의 이름 첫 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 무주는 '전주'나 '완주'처럼 '고을 주' 자를 쓴 지명이 아니라 무풍과 주계가 합쳐진 이름이다.

덕유산리조트가 있는 설천면(雪川面)은 1914년 풍서·횡천·신풍의 3개 면을 통합하여 신설한 면이다. 설천은 조선 영조 때 이봉상(1676~1728)이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설천(雪川)’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에서 수도한 9천 승려들이 밥을 짓느라 아침저녁으로 쌀을 씻어 하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눈처럼 하얗게 흘러내렸다고 하여 생겼다고 하기도 한다. 곤돌라로 닿는 덕유산의 봉우리 이름도 설천봉(1,520m)이다.

 

오후 1시 40분께 덕유산리조트의 곤돌라(리조트에선 ‘곤도라’로 표기돼 있다) 탑승장이 있는 설천하우스 주차장에 닿았다.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주차장도 꽉 찼고, 곤돌라 승차권을 판매소 앞도 사람들로 잔뜩 붐볐다. 20여 분 줄을 서서 예약한 표를 사서 탑승장으로 가니, 줄이 100m도 넘게 꼬불꼬불 이어졌다.

▲ 덕유산 리조트의 곤돌라 탑승장. 좌우에 스키 슬로프가 있어 스키를 타러 온 이들이 원색의 복장으로 지나가고 있다.
▲ 리조트의 곤돌라. 케이블에 고정된 차량이 순환, 회전하는 케이블을 따라 움직이는 게 곤돌라다.

‘케이블카’와 ‘곤돌라’는 어떻게 다르나

 

영상 5도가 넘는 날씨라, 탑승장 부근은 두껍게 쌓인 눈이 녹아 질퍽했다. 그나마 날씨가 푹해서 망정이지, 거의 70여 분을 기다려서야 곤돌라에 탑승할 수 있었다. 곤돌라(gondola)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교통수단으로, 보트의 일종이다. 그러나 한국의 스키장이나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곤돌라는 케이블에 매달려 움직이는 소형 케이블카다.

 

곤돌라는 설천봉의 탑승장에 닿는 데 20여 분 걸린다. 지상에서 해발 1,520m에 오르는 데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지난번에는 영하로 꽁꽁 얼어붙은 날씨라 곤돌라의 플라스틱 창에 낀 성에로 밖이 잘 내보이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다르다. 곤돌라는 급경사를 여러 차례 급상승하곤 했다.

 

곤돌라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아이들과 곤돌라와 케이블카의 차이점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고정된 케이블에 걸쳐진 차량이 움직이는 게 케이블카고, 케이블에 고정된 차량이 순환, 회전하는 케이블을 따라 움직이는 게 곤돌라란다.

▲ 곤돌라는 탑승기 여러 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 한국관광공사

즉, 케이블카는 차량이 움직이고, 곤돌라는 케이블이 돌아가는 구조다. 그래서 케이블카는 탑승기가 두 대로, 상하로 교차 운행하는데, 정지 상태에서 사람이 탄다. 그러나 곤돌라는 탑승기 여러 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으며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다.

 

설천봉에 닿자, 예전과 다르지 않은 하얗게 눈 덮인 평지에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누각 쉼터 상제루(上帝樓)가 한눈에 들어왔다. 설천봉 주변 평지는 아마 겨우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가 봄이 와야 그 눈이 녹을 것이었다. 우리가 설천봉에 닿았을 때 온도는 영상 0.6도였다.

 

아이젠 빌려 향적봉에 오르다

 

상제루에서 아이젠을 빌려서 장착하고 바로 향적봉을 향해 출발할 때는 3시 40분. 상제루 장비 대여점 주인은 늦어도 4시 반까지는 내려와야 하산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먹으려고 준비한 컵라면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날씨가 화창해서일까, 향적봉으로 오르는 600m의 덱(deck) 계단 길은 내려오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들로 붐벼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난번과 달리 길 좌우의 나무에 눈은 녹고 없었고, 길바닥에만 겹겹이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을 벗은 나무들 가운데, 고산의 바람에 대응하느라 키가 크는 대신 옆으로 자란 주목(朱木)이 다부진 체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 설천봉의 상제루 쉼터. 여기서 우리는 아이젠을 빌렸다. 가히 상제(하느님)에 어울리는 누각이다.
▲ 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본 산 아래. 어디인지는 분간하지 못했다.오른쪽에는 저수지도 보인다.
▲ 나무에 쌓인 눈은 다 녹고, 눈은 데크 길 좌우에 밭을 이루고 있었다.
▲ 정상에 이르는 데크길에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왼쪽 봉우리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향적봉(1,610m)이다.
▲ 비교적 날이 맑아서 멀리 중첩한 연봉을 바라볼 수 있었다. 능선에 두드러진 것은 줄지어 선 나무들이다.
▲ 향적봉을 뒤로 한 하산길. 데크 길 바닥에 잔뜩 쌓인 길을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숨이 가빠질 무렵에 향적봉에 닿았다. 정상의 표지석 주변에는 인증 사진 찍으려는 이들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곳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우리는 내려가는 대신, 정상에서 멀찌감치 향적산 대피소를 내려다보고 말았다.

 

눈 녹아, 다시 보는 새로운 풍경들

 

지난번 산행에서 온 천지가 눈으로 가득 차 보이는 게 거의 없었다면, 눈이 녹은 향적봉에서는 산 아래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구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미세먼지로 잔뜩 흐렸던 하늘이 덕유산 자락에 들어서면서 새파란 하늘도 바뀌어져 있었다.

▲ 잠깐 한산해진 데크 길. 좌우의 나무들은 눈을 벗었지만, 두껍게 쌓인 눈이 덕유산의 명성을 더해준다.
▲ 데크 길 주변에는 고산의 드센 바람에 적응해 키보다 옆으로 자란 다부진 몸피의 주목이 곳곳에 서 있었다.
▲ 데크 길 어귀에 선 고사목. 아래도 상제루와 곤돌라 탑승장 등이 보인다.
▲ 하산길에서 내려다본 상제루 주변 풍경. 여기 쌓인 눈이 녹으려면 아마 봄이 깊어져야 할 터이다.
▲ 상제루 아래의 독돌벽. 사람들이 곤돌라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다.

향적봉에서 동료의 부음을 받다

 

무엇보다도 사진으로만 보았던 눈 덮인 산, 눈이 녹으면서 나무들이 흐릿하게 드러나 잿빛을 띤 산자락, 능선에만 일렬로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봉우리들이 중첩된 풍경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면서 만났던 고사목도 몇 그루도 만났다.

 

바쁘게 하산해 아이젠을 반납하고 나니 또 줄이다. 이번에는 30분 정도 기다려 곤돌라를 탈 수 있었다. 리조트로 내려오니 시간은 5시 반이 넘었고, 우리는 정상에서 먹지 못한 컵라면을 먹어 치우고 바로 귀로에 올랐다.

 

나는 향적봉 정상에서 들은 동갑내기 해직 동료의 부음을 자꾸만 떠올렸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으로 경과가 좋다고 들은 게 1월 초순인데, 그는 결국 한 달 뒤에 그리 먼 길을 떠나 버린 것, 나는 이제 띄엄띄엄 들려올 이 부음에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걸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2024. 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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