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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친구, 자네 늦둥이가 곧 대학을 간다네…

by 낮달2018 2020.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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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과 함께 온 아이들 편지. 3남매는 어버이의 가르침대로 늘 우애 있게 잘 살아갈 것이다.

벗이 50대 초반에 돌연히 세상을 버리면, 늦둥이 초등학생을 두고 세상을 떠나면 무릇 벗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벗이 교육적 신념을 같이하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동지일 때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생모’ 여섯 해를 정리하다

 

2008년 2월에 장성녕 선생이 졸지에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죽음이 오래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건강한 친구였으나 어느 날 ‘풍’이 와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반년 휴직 후에 회복한 상태로 복직했는데 갑작스럽게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두 차례에 걸친 수술…,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황망한 가운데 장례를 치르고 돌아섰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거창 위천 계곡 건계정 부근의 산자락에 그를 배웅하고 돌아와 우리는 소주나 마시고 눈물이나 찔끔대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유족들이 의연함을 잃지 않아서 우리는 한숨을 놓았다.

 

늦둥이 솔이 초등 6학년, 솜털이 부스스한 아이를 남기고 그는 그렇게 덧없이 갔다. 복직 후 20년을 채우지 못해 연금은 물론 없었고 유족들에게 남은 건 얼마간의 보험금과 퇴직금이 다였다. 어쩌나, 남은 가족들을 도울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삼장일박(三張一朴)’에서 졸지에 ‘이장일박’이 된 우리는 생짜로 앓기만 했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

 

그런 우리를 구제해 준 이들이 밀양의 선생님들이다. 전교조 밀양지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박, 구, 정 선생이 바로 그들이다. 이분들이 밀양과 경북의 동료 교사들이 힘을 모아 유족을 돕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 기념품으로 마련한 도자기. 과일 접시 한 쌍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장성녕을 아는 경북의 동료 교사들이 거기 화답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장성녕 선생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장생모)’이다. 모임을 꾸리는 것부터 이후 모임을 운영하는 일을 맡아 준 세 분 선생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말 어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6년간 장생모를 건사해 온 건 전적으로 이분들의 몫이었다는 얘기다.

 

밀양을 중심으로 한 경남에서 24명, 전임지 경북에서 모두 25명, 그리고 생전에 장성녕이 활동했던 ‘부산 경남 기술·가정교사 모임’이 장생모에 참여했다. 아니 ‘장성녕샘추모’, ‘장성녕추모’라는 익명으로 함께 해 준 두 분도 포함하여야 한다. 아직도 누군지 모르는 이분들은 지난 6년간 한결같이 장생모에 힘을 보태주었다.

 

50여 명이 모은 ‘장학적금’

 

회원마다 매월 1, 2만 원씩 자동 이체한 성금이 모 계좌로 들어오면 6년 후 솔이 대학에 들어갈 때 만기가 되는 적금을 부었다. 일 인당 매월 1만 원씩 냈다면 72만 원, 2만 원씩이면 144만 원이다. 액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잊어버리지 않고 매월 이체를 계속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회원 대부분은 잊지 않고 이체를 이어주었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었다. 매월 붓는 적금 외에도 조금씩 자투리로 모이는 돈은 명절 선물을 사는 데에 쓰거나 집에 큰일이 있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유족에게 맡겼다. 이 만만치 않은 일을 맡아서 해 준 이가 밀양의 세 분 교사들이다.

 

그리고 여섯 해가 흘렀다. 아버지를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그의 늦둥이는 그 새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아비와 판박이의 모습을 한 아이는 건장한 체격의 소년으로 의젓하게 자랐다. 맏이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 애가 시집가던 날, 아직 개혼(開婚)도 하지 못한 우리 2장 1박은 마치 친딸을 여의는 듯 들떠 있었던 듯하다. [관련 글 : 시나브로 아비의 시대는 가고]

 

아, 맏이가 혼인하기 전에 그 어머니가 또 세상을 떠났다. 그 부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황당한 부음 앞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여의고도 의연하게 집안을 추슬러 온 아이들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지아비가 먼저 떠난 길을 따른 것이었다. 2012년 5월이었다. [관련 글 : 지아비와 함께 편히 쉬시라]

 

지난 7월로 장생모의 ‘장학적금’은 만기가 되었다. 7월 하순에 밀양의 세 선생님과 우리 2장 1박(경북 운영위원)은 밀양서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유족을 돕기 위한 한시적 목적이 끝났으므로 장생모의 활동을 끝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 2장 1박은 밀양의 세 분 선생님께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는데, 밀양의 선생님들은 지난 6년 동안 변함없이 후원을 이어준 회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확인한 것은 지난 6년 동안 모임이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이 ‘잘 살았던’ 덕이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장생모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우린 그저 마음만 끙끙 앓고 말았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짧지 않은 6년이란 시간 동안

후원금을 꾸준히 이어주신 회원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50여 동료들이 푼푼이 모아 이룬 적금은 내년에 솔이가 대학에 진학하면 4년간의 ‘학자금’이 될 것이었다. 그것은 그 아비의 삶에 관해 동료이며 동지였던 우리가 바치는 사랑이고 우정이었다.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그것만으로 사람 노릇을 한다는 자괴감을 어찌하지 못하면서 이어온 인정이었다.

 

밀양 시내의 어느 한정식집에서 열린 모임에 맏이와 솔이 녀석이 나왔다. 아들을 안고 나온 맏이는 어머니 태가 역력했고 성큼 자란 솔이 녀석은 한결 의젓해져 있었다. 그 모임의 밥값을 솔이 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꼭 ‘선생님들께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단다.

 

우리는 극구 만류했지만, 결국 밥값은 녀석이 냈다. 우리는 돌아서서 계산을 하는 녀석의 건장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댔다. 아마도 아비인 장성녕도 씩씩한 젊은이로 자라난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활동을 종료하면서 자투리로 남은 얼마간의 돈으로 회원들에게 조그마한 기념품을 보내 드리기로 했다. 회원들은 기념품 받을 주소를 보내 달라는 요청에 별로 제대로 돕지도 못했다면서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어렵사리 회원들 모두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쉰 명의 동료가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

 

6년, 회원들 가운데에서도 유고가 있었다. 선배 김창환 선생님은 지난해 2월 세상을 버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음은 좀 많은가 말이다. 장생모 활동을 마치면서 만든 기념품은 선생님 대신 사모님께 보내기로 했다.

 

충청도의 한 도예가가 만든 과일 접시 한 쌍이 도착한 것은 어저께부터다. 두 개의 접시 밑에는 ‘장성녕 선생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2008.3~2014.7)’이라고 씌어 있었다. 굳이 접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삶의 길목에서 때때로 그 유족들, 특히 솔이 녀석이 가는 길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휴대전화를 뒤져서 밀양의 박 선생이 보내온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찾아 읽어 보았다. 그가 보내온 이 전언을 나는 경북 회원들에게 전해 주었다. 정말, 그렇다. 그건 우리 50여 동료, 동지들이 ‘6년이 걸려 완성’한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이 맞다.

 

자랑스러운 장생모 회원 여러분,

십시일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가 6년 5개월 동안 바로 그 말의 뜻풀이를 온몸으로 해 보였습니다.

외유내강 너그럽고 유머 넘치던 장성녕 선생님을 추억하기 위해,

우리 50여 지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서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을 6년에 걸려 완성했다고 믿읍시다.

그동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저희 몇몇 운영위원들을 믿고

묵묵히 통장에 후원금을 넣어주신 여러 선생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가 모은 이 마음이 유족에게 식지 않은 채 따뜻하게 가 닿으리라 믿습니다.

통장은 폐쇄하더라도 간간이 솔이 소식 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장생모 금고지기 박○○

 

곧 이른 추석이 다가온다.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고 각각 6년, 4년째 맞이하는 한가위다. 한데 모인 3남매가 세상을 떠난 어버이를 추억하면서 단출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만나는 명절을 그려보면서, 문득 나는 장성녕 선생이 남긴 넉넉한 웃음소리를 떠올려 보고 있다.

 

 

2014. 8.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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