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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낡고 오래된’ 차 이야기

by 낮달2018 202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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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일, 금요일의 행운

▲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 차는 때로 주인의 사회적 위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

현재 내가 타고 있는 차는 세피아Ⅱ인데 1997년 12월식이다. 오는 12월이면 꽉 찬 10년이 된다. 대략 16만 5천여 킬로미터를 탔다. 10년이 다 됐지만 차는 여전히 무던한 편이고, 무엇보다 차를 바꿀 만한 여유가 없으니 당분간(이게 몇 년쯤이 될는지는 알 수 없다.) 더 곁에 두어야 하는 물건이다.

 

차도 사람처럼 늙는다. 해수 앓는 노인처럼 호흡이 고르지 않기도 하고 관절이나 뼈마디가 탈이 나 움직일 때마다 우둑우둑 소리를 내기도 한다. 사람과는 달리 얼마간의 돈을 들이면 관절이나 장기를 바꿔 낄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젊어서 곱고, 씩씩하다가 늙으면 미워지고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람을 닮았다. 그러다 보니 갓 사서 반짝이는 차는 품 안의 각시처럼 애지중지하다가도 해묵어 낡으면 으레 거기 있는 장롱처럼 바라보게 되는 아내처럼 덤덤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새 차를 사서 사흘돌이로 차를 닦고 가꾸는 부지런한 이웃이 차에 난 조그마한 흠집에 전전긍긍하고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걸 목격하면서 적어도 ‘차가 주인이 되는 과잉관리’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초보였던 아내가 후진하면서 트렁크 옆면을 잔뜩 우그려 놓았을 때도 ‘잘했네’로 받고, 고치자는 제의는 깨끗이 잘라 버렸다. 내 논지는 간단하다. 사람 늙는 것처럼, 어차피 차도 그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헌 차가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결혼식에 갔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움푹하게 팰 정도로 긁어 버렸고, 보닛에는 동네 조무래기 짓인지 못으로 거칠게 그어 놓은 하트가 몇 개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세차장에 맡기는 세차는 정확히 두 번밖에 하지 않았다.

 

조금 더럽다 싶으면 자동세차기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고, 진공청소기로 차 안을 빨아내는, 손수 세차로 그쳤다. 사소한 흠집은 생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성가신 일이 없다. 길가에서 공사하던 특장차 때문에 생긴 옆구리 상처도 ‘됐어요.’로 끝내 버렸다.

 

무사고로 잘 굴러가던 이 만만한 ‘애마’가 지난해 정월 초순엔 된통 욕을 보았다. 장인어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밤늦게 처가로 달려가던 길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제법 가파른 재를 넘어야 했는데, 비가 살짝 지나간 도로는 잔뜩 미끄러웠고, 운전이 어려울 만큼의 짙은 안개가 산등성이를 낮은 포복으로 기고 있었다.

 

비상등을 켜고, 간신히 재를 넘어 내려오던 내리막길의 막바지께였다. 시나브로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훤해졌다고 느꼈고, 갑자기 낯설어진 길이 어디쯤인가 헤아리며 오른쪽 커브를 도는 순간이었다. 차가 기우뚱하는가 싶었는데 가속으로 미끄러지면서 왼편 길의 경계용 콘크리트 블록으로 돌진해 버렸다.

 

핸들은 이미 조작 불능 상태, 블록 너머 야트막한 언덕과 거기 완강하게 버티고 선, 민가의 콘크리트 담을 나는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차가 블록과 차례로 부딪치고 다시 튕겨 나오는 걸 눈을 멀쩡하게 뜬 채 지켜보아야 했다.

▲ 내가 10년 동안 탄 차와 같은 세피아 Ⅱ

차는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섰고, 왼쪽 무릎 쪽에 잠깐 통증을 느꼈다. 옆자리의 아내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찌그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야, 그건 순간적인 근육의 긴장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시간은 밤 9시께. 마침 통행량이 많지 않은 시골길이어서 마주 오는 차도 뒤따라오는 차도 없어서 2차, 3차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1월 13일, 금요일 밤이었다.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거나,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운수 대통했다”라는 위로는 사고 후에 으레 건네지는 위로긴 하지만, 그 함의는 깊고도 넓다. 인간의 목숨이란 건 고작 몇 분, 몇 센티미터의 시간과 공간을 다투어 삶과 죽음을 갈라 버리고, 경상과 중상이 나뉘니 말이다.

 

몇 가지 가정들이―이를테면 도로 경계 블록이 부러지면서 차가 도로 밖으로 튀어 나가 언덕배기를 굴러 민가의 벽에 부딪혔더라면, 도로 한가운데로 튕겨 나올 때 반대편 차선의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더라면, 뒤따라오던 차가 다시 꽁무니를 들이받아 버렸더라면 등―현재 상황이 만만찮은 행운이라는 사실과, 불특정의 우연에 의해 자신의 실존이 유지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입원 중인 어른을 구완할 가족들의 이동 편의를 꾀할 작정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견인해 온 차를 불 꺼진 정비공장에 넣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억세게도 재수가 없다’라고 생각했지만, ‘재수 없음’의 건너편은 ‘불행 중 다행’이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수리 계약을 했는데, 렌트 카를 알아보나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웬걸, 정비공장에서 고물 프라이드 한 대를 그저 타라고 주었다. 그 흰색 프라이드를 나흘쯤 탔다. 정말 오래된 차라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게 없다.

 

그래도 자동기어였는데, 기어가 제대로 물리지 않는지, 조작 때마다 조금씩 앞뒤로 흔들어 주어야 했고, 운전석 안전띠는 꼬여 있어서 일일이 달래가며 당기거나 풀어 주어야 했다. 라디오는 틀면 이내 불쾌한 소음을 내곤 했고, 늙고 지친 엔진은 시속 80km를 넘으면 거의 탱크 소리를 냈다.

 

운행 중에는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지만, 정지 상태에서 핸들을 조작하는 것은 어른들의 표현을 빌자면, ‘죽 먹고는 못 돌리는’ 수준이었다. 미덕은 단 하나, ‘일발 시동’이었다. 구멍에 열쇠를 꽂고 튼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 경쾌한 소음과 함께 시동이 걸렸는데, 그건 정말 산뜻했다.

 

맡긴 지 나흘 만에 수리된 차를 찾아 나오는데, 부드럽게 감기는 핸들과 발을 올려놓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미끄러지고 있는 차체 때문에 갑자기 구름 위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서 연거푸 중얼거렸다.

 

“야, 정말 내 차, 좋다야!”

아내를 태우고는 좀 더 흐물흐물해져서 거듭 물어댔다.

“여보. 8년이 넘은 늙은이지만, 우리 차 아직도 쓸 만하지? 그렇지?”

 

(2) 욕망, 혹은 망각

 

올 4월께였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프 한 대가 와서 꽁무니를 받아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았더니 상대는 방심했다고, 미안하다고 사죄하면서 수리해 주마고 했다.

 

사고나 사고 비슷한 게 얼른거리기만 하면 나타나는 게 견인차지만, 요즘은 렌트 카도 나타나는가. 차를 인도 곁에 붙이고 상대와 수리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데 깍두기 머리의 청년 둘이 나타나 정작 당사자는 제쳐두고 내게 렌트 카를 이용하라고 부추겼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도 그도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고, 청년은 내게 길가에 세워둔 하얀 토스카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내가 그 신형의 중형차를 이용한 건 불과 만 하루뿐이다. 그러나 출퇴근 때와 차를 찾으러 가는 데만 탄 차를 정비공장에 넘겨주는데 마음에 미련이 한 움큼 남았다.

▲ 내가 만 하루 동안 탄 렌트카. 중형의 이점을 깨닫게 해 준 차였다.

3만 km 남짓 탄 차였는데도 얼마나 조용한지, 시동을 걸어놓고도 시동이 걸리지 않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른바 ‘탁월한 정숙성’이다. 찻값이 어디 가는가, 옳은 말이다. 스티어링이 이름뿐인 ‘파워’여서 정지 상태에서 휠을 돌리는 게 만만찮은 내 고물차에 비기면 그 차의 조향(操向)은 그저 먹기 수준이었다.

 

승차감은 또 좀 안정적이었던가. 내 차가 운전석에 앉으면 뭔가 구석진 데에 묻히는 느낌이었던 데 비하면 이건 사통팔달의 망루 위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는 기분이었다.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얹는가 싶으면 어느새 차는 미끄러져 나갔고, 코너링도 너무 부드러워 내 차에서처럼 몸을 움직여 균형을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열쇠를 정비공장의 당직자에게 건네는데 기분이 썰렁해졌다. 내 열쇠를 받아 쥐자 손에 익은 익숙한 감각이 편안했지만. 정비공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정맞으면서도 칙칙한 느낌의 소음이 금방 차 안을 자욱하게 채우는 듯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 만에, 내 몸과 마음과 느낌은 크고 좋은 새 차의 부드러움에 흠씬 빠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둔감해졌다고 믿었던 감각은 하룻밤 새 예전처럼 예민해진 것이다. 물론 내가 다시 고물차에 익숙해지는 데 걸린 시간도 하루가 채 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때로 얼마나 단순한 짐승인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다시 눕고 싶어지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상승을 구태여 나무랄 일은 없다. 대박을 꿈꾸면서 주기적으로 복권을 사는 소시민은 어찌 보면 가장 냉정한 현실주의자일지 모르니 말이다.

 

한 달쯤 뒤에 나는 자동차의 키 박스를 통째로 갈았다. 너무 오래 썼던가, 둔감해진 열쇠가 자꾸 헛바퀴만 돌았기 때문이다. 잠금장치를 갈면서 받은 날이 선 열쇠의 감촉은 산뜻했다. 열쇠를 지그시 틀었을 때 네 개의 문짝에서 일제히 반응하는 금속성은 또 얼마나 경쾌했던가.

 

그리고, 나는 이내 저 중형차의 부드러움과 정숙성 따위는 잊어버렸다.

 

 

2007. 8.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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