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30 보궐선거의 결과
굳이 야당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6·4 지방선거에 이은 7·30 보궐선거의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지지할 후보가 있건 없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던 지방선거와는 달리 제 고장에 선거가 없었던 경우에 사람들은 냉정한 ‘관전자’가 될 기회다.
워낙 여당의 실정이 거듭된 상황이었는데도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야당의 헛발질 덕분에 선거 결과는 아는 대로다. 기사회생한 여당은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시나브로 세월호 정국을 비켜 갈 속셈을 은근히 비치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자식 잃은 슬픔을 넘어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고 믿으며 싸우고 있는 유족들이 주장하는 특별법의 갈 길은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지리멸렬…야당 , ‘유권자’의 몫은?
재보선이 끝나고 나서 당사자인 야당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로라하는 정치 평론가들의 선거 결과 분석도 백화제방에다, 만화방창이다.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의 분석은 대동소이하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격인 야당에 가해지는 돌팔매 앞에 패자들은 그예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략도 명분도 시원찮았던 야당의 참패는 ‘지리멸렬’이나 ‘자업자득’으로 정리되고 있고 이에 따로 시비를 걸 이는 아무도 없다. 지난 대선부터 총선을 거쳐 네 번에 걸친 선거를 치러내는 동안 줄곧 지기만 해 온 야당에 덧씌워진 ‘무능’이라는 프레임은 아주 요지부동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관전자’가 되었던 일반 시민들도 할 말이야 좀 많겠는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나 평론가들처럼 정제된 언어로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대신, 그들은 푸념과 한갓진 욕설로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찧고 까불 수밖에 없다.
“야당이 시원찮은 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 않아?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거라며? 그런데 현 정국에 11:4를 만들어 준 유권자는 도대체 뭔데?”
“글쎄 말이야.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지. 하기 좋은 말로 ‘야당을 심판’했다고 하는데,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거야. ‘위대한 국민’은 무슨 개뿔……. 그게 이 나라 유권자의 수준이라고 봐야지, 뭘…….”
모두가 ‘여당의 승리’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야당을 두들겨 패는 게 공식이 된 상황인데 어제 <경향>에는 서민 교수의 칼럼 ‘이제, 유권자를 욕할 때다’[기사 바로 가기 ☞]가 실렸다. 그는 너도나도 야당을 매질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야당에 대한 쓴소리도 필요하지만, 그 비난을 유권자에게도 좀 나눠 드리자.”라고 제안하고 있다.
우리 정치 현실을 신랄한 반어와 역설로 풍자해 온 서 교수는 정색하고 이번 선거 결과가 야당의 잘못 때문만일까 하고 자문한다. 그는 자신의 문제 제기의 근거를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 수준과 일치한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정치란 유권자의 정치참여에서 이루어지므로 국민의 수준과 무관하게 ‘정치만 진흙탕’에 빠져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국민은 위대하다.’라고 말하지만 ‘똑똑한 국민’이라면 ‘지난 대선 때 정보기관이 댓글 공작을 벌이고, 몇십 년간 우려먹은 구태의연한 색깔론을 선거의 주된 쟁점으로 부각’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현재의 우리 정당들의 모습은 우리 국민의 수준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면서.
그는 패배의 원인을 야당에만 돌리지 말고 ‘여당은 잘했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거라는 게 집권 세력에 대한 심판이지, 야당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간첩을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세월호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을 유언비어를 동원해 ‘뭉개고 있는’ 집권 세력의 행태가 야당보다 ‘수십 배 더 나쁘다’라는 걸 근거로 든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이렇다.
우리 국민들은 철지난 색깔론에 세뇌당하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열광해 자기 지역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반대편 세력이 무상급식을 주장하면 나라가 거덜 난다고 난리를 치면서도, 우리 편이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을 주겠다”고 하면 열광한다.
‘국민은 위대하다.’란 명제는 아무도 함부로 부정하지 못한다. 설령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그 명제의 ‘무오류성’을 신봉한다고 즐겨 말한다. 일찍이 고향인 부산에서 여러 차례 낙선하고도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다’라고 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은 그것 자체로 진실이면서도 정치인의 국민관을 일정하게 드러내는 수사이다.
진실로 ‘국민은 위대’한가?
이 명제에서 말하는 ‘국민’이 ‘대중’이나 ‘민중’과 다르지 않은 개념이라면 이 99%의 사람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주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기적 국면에서 이들 국민의 선택이 늘 옳았다고는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국민은 위대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을 수도 있다’라는 게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어쨌든 그 ‘국민’은 이번 선거에서 여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른바 ‘현안’이라는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그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은 더욱 꼬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만큼의 충격을 던진 이 참사를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전망하지 못하게 할 만큼.
우리 사회와 현실을 지켜보면서 그것에 대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긴 하지만 서 교수는 정치인도 정치학자도 아닌 한 사람의 기생충학자일 뿐이다. 그가 저 고전적 명제에 시비를 걸면서 현실에 대한 책임을 ‘유권자’에게도 나누자고 한 것은 필시 그런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군부대에서 일어난 끔찍한 폭행으로 인한 한 병사의 죽음에 대해 온 사회가 다시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한 생때같은 자식을 죽여서 돌려보내는 군대는, 나라는 도대체 그 어버이들에게 무엇이냐고. 무엇으로 그 야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위대하다’라고 기려진 국민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식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데 그치는 평범한 어버이가 아니라 분노로 긴요한 시대의 고비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들이었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따른 걸맞은 올바른 선택으로 현실의 매서운 심판자가 되어서 말이다.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이라고 규정한 신영복 선생의 ‘민중’을 떠올린다. 그 민중과 2014년의 현실을 살아가는 유권자들, 혹은 국민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2014. 8.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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